이완의 자세

가을해는 짧아서

by 봄날

토요일 오전의 요가원은 빛으로 가득하다. 10층 건물에 8층의 한 귀퉁이, 네 면 중 두 면이 창으로 이루어진 공간. 넓은 창은 블라인드로 한 번, 그 위에 하얀 커튼으로 또 한 번, 이중으로 가려진 것이 무색하다. 초가을의 햇살은 은은하지만 강력하게, 공간을 밝고 따사롭게 물들인다. 창문 옆에 매트를 깔고 눕는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또 들이마신다. 이 시간, 이 공간이 주는 위로를 들이마신다.


어깨에 긴장을 내려놓으세요. 온몸에 힘을 풀어내세요. 요가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움직일 때마다, 녹이 슨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내 몸을 만난다. 그 안에 깃든 긴장, 애씀, 바쁨을 마주한다. 내려놓는데도 연습이 필요함을 배운다. 이완의 자세를 익힌다. 천천히 선풍기가 돌아간다. 바람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하얀 커튼 자락이 파도치듯 밀려든다. 적당히 데워진 공기 속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 그 바람이 만들어낸 파도를 온몸으로 느낀다. 좁은 매트 안에서 마음을 비워낸다.


옷을 갈아입고 운전대를 잡는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주말에 여백이 좀 생겼다. 요가 후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거나, 주중에 미뤄 놓은 집안일과 장보기를 한 후에는 가끔 남편과 콧바람을 쐬기도 하는 요즘. 오늘은 백 만년 만에 친구와 약속이 생겼다. 어젯밤, 친구야, 나 파주에 왔는데, 네 생각나서,라는, 조금 뜬금없는 문자를 받고 놀라기도 잠시,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파르게 이어진다. 파주 올 거면 미리 연락을 좀 하지…, 하면서도, 언제, 어디서 볼까? 뭐 먹고 싶어? 서둘러 만남을 정했다.

학창 시절부터 따뜻하고 단단해서 큰 언니 같았던 친구. 방황했던 십 대와, 찬란했던 이 십 대를 함께 보낸 친구의 몸집이 오늘은 왠지 더 작아 보인다. 먼 지방에 사는 친구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궁금증 가득한 내 눈을 향해, 화장기 없는 친구가 말한다. 나 병가 냈어. 어? 왜? 어디가 아픈데? 몸이 아픈데 어떻게 또 여기까지 온 거고? 쏟아지는 나의 질문 앞에 친구는 담담히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언제부터 학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똑같이 아끼는 제자 중 하나일 뿐인데, 그들을 심판하고 추후 지도까지 맡아야 하는 교사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상처받는지, 그 와중에 2차 가해의 대상으로 오해받고 해명하기까지 해야 하는지. 간혹 동료 교사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앞에, 함께 좌절하고 슬퍼했던 순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막상 내 친구에게,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우리를 웃게 하던 친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그저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숨만을 더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우린 함께 걸었다. 카페에서 식당으로, 식당에서 미술관으로, 미술관에서 다시 책방으로. 넘치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제 막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자연에 감탄하며, 텅 빈 거리 한가운데를 걷고 또 걸었다. 답답하고 불안한 속내는 투명한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내고, 그 옛날 우리가 좋아했던 남학생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다가, 서로 경쟁하듯 남편 흉을 보다가, 맞나, 맞제, 장단 맞추며 함께 웃었다. 너무도 우리 취향인 책방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소녀처럼 발을 구르며 기뻐하기도 했다.


가을 해는 짧아서, 어느덧 작별의 시간. 책방에서 이야기 나누었던 최애 책을 서로에게 선물로 건네며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늘 친구가 고픈 사람이니, 언제든 연락하라고, 아프지 말라고 당부하며 헤어지는데, 주책맞게 눈에 물이 차올라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친구에게 이번 가을이 상처만 가득한 시간이 아닌 이완의 시간으로 남기를, 모든 상념을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고, 우리가 오늘 함께 바라본 하늘처럼 밝고 맑은 기운으로 새롭게 차오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늘만 보았다.


아침에 연습했던 이완의 자세를 되짚어 본다. 좁은 매트 안에도 햇살과 바람과 파도를 즐겼던, 위안과 평화를 느꼈던 시간을 떠올려 본다. 다음에는 진짜 파도를 만나러 떠나 볼까.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 털썩, 몸을 뉘어볼까. 어깨 위에 덕지덕지 붙어버린 책임과 의무와 타협과 불안을 모두 내려놓고, 여고 시절 우리들 모습으로 돌아가 맘껏 깔깔대며 웃어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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