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던 것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다. 예상보다 더 차가운 감촉에 발가락이 오므라든다. 더 늦기 전에 발을 빼야 할까, 이왕 발을 적셨으니 목표했던 바위를 향해 다음 걸음을 옮겨야 할까. 고민은 순간에 그친다. 직진.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발가락에 힘을 싣는다.
- 하니야. 창밖을 봐. 눈이 와.
- 진짜?
- 지금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이 정말 예뻐. 바로 앞이 밤나무 숲이거든. 숲으로 가는 오솔길에 눈이 하얗게 쌓여서, 장관이야. 함께 보면 좋을 텐데.
전화기 너머 다정한 속삭임에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한겨울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따뜻한 우리 둘만의 공간을 상상했던.
그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들이기로 했다. 침대, 장롱, 냉장고, 세탁기를 모두, 눈처럼 하얀 것들로 골랐다. 함께 덮을 이부자리조차도, 새하얀 바탕에 반짝이는 은빛 수가 놓인 것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야 내가 발 들인 곳을 제대로 돌아보았다. 우리 둘만의 공간은 25평 작은 아파트에서 방 하나가 다였다. 그가 낭만적으로 속삭였던 그의 집은 오랫동안 팔순 노모와 함께 살아온 공간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 늦게 알았다.
주중에는 출퇴근으로 각자 바빴다. 모처럼 달콤한 늦잠에 취해 뒹굴고 싶은 주말 아침, 새벽부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그에게 나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궁금해져 거실로 나갔다. 노모와 다정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는 그의 앞에는 빈 접시가, 다 먹은 사과 껍질만이 놓여 있었다. 나를 위해 남겨둔 사과는 한조각도 없었다. 왜 그런 사소한 일에 눈물이 났던 걸까.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척, 베란다 너머 밤나무 숲을 건너다보았던 날들.
- 아침은 뭐 먹지? 주말만이라도 토스트랑 커피랑 간단히 먹으면 안 될까?
- 어머니도 계신 데, 어떻게 그래.
모르지 않지만, 말이라도 해보는 거지. 내가 꿈꾸던 둘만의 달콤한 시간이 아쉬운, 마음이라도 알아주라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돌아서서 된장찌개 끓일 준비를 했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된장 풀고, 무랑 감자랑 양파를 썰어 넣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가 전화로 일러준 데로 하는데, 엄마가 끓여준 그 맛은 안 나고. 엄마가 보고 싶어졌던 날들.
- 동서, 명절 장보고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지? 홀몸도 아닌데.
- 아니에요. 같이 했어요.
- 하긴, 서방님이 워낙 다정하게 잘하시지.
- ……
결혼 후 첫 명절, 그의 형과 형수, 조카들이 와서 저녁을 해 먹고 다음 날 차례를 지냈다. 배가 제법 나와서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일 년에 두 번이니까, 쏟아지는 설거지를 해내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형님 내외가 점심까지 먹고 돌아가자, 나도 친정에 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 작은누나가 저녁에 온다는데, 얼굴 보고 부산은 내일 가면 어때?
- 그건 아니지. 당신 누나들이 엄마 보러 오듯이, 나도 엄마 보러 가야 하는 거잖아.
꿋꿋이 짐을 싸서 기차에 몸을 실었던 그날. 우린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지는 않았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울퉁불퉁한 바위와 굵은 모래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계곡 한가운데를 지나온 참이다. 이제 막 작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만하면 높이도 괜찮고, 표면도 평평해서 안정적이다. 햇볕도 적절히 가려지는 위치라,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발끝으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 이제, 그만 나갈까?
그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물속에서 발을 빼고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앗, 차가워, 첫발에 놀라 비명을 지르고는 계면쩍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 한발 한발 신중하게 걸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몸 전체가 기우뚱하는 사람.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있게 발을 내딛다가 그만 미끄러져 물속으로 첨벙,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 그저 물밖에 앉아 그런저런 사람들을 구경만 하는 사람들까지. 그 안에 내가 보인다.
유속이 꽤 빠르다. 안에 있을 때는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는데.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에 햇살이 부서지며 빛난다. 한없이 따갑게만 느껴졌던 햇살이 만들어낸 반짝임에 눈이 부신다. 물속에 있을 때는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기에 바빴다. 목적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재단하느라, 혹여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몰랐던 것들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