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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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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인애 Mar 16. 2019

몇 해 전의 이야기

혼자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던 겨울까지

여행을 좋아한다고 이십몇 년을 확신하며 살았는데, 몇 차례 실제로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쩌면 그냥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왔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 오면 지금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무작정 멀리 떨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도피 심리를 보며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거라고 단정해 왔던 것이다. 이왕이면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로, 이왕이면 말도 잘 통하지 않으면 좋다. 그런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흔쾌히 말할 수 있는 건지 이제와 서야 잘 모르겠다. 떠나서 내내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좀처럼 내내 즐거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몹시 낯설었던 곳이 전혀 낯설지 않은 장소로 변하는 사이- 내 방, 내 이불속, 내 책상, 내 절친한 이들이 몹시 그리워지는 순간을 직면하게 되는데, 그냥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여행인 건데. 계속 잡념을 이어가다 보니 딱히 좋고 싫고로 나눠 말하는 게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여러 문제에 앞서 좋거나 싫다기보다는 어렵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편이다. 확실히 좋은 것보다는 확실히 싫은 게 더 많은 편이고.


몇 해 전의 일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했던 휴학 이후 몇 개월을 뜨거운 장판에 눌어붙은 밀가루 반죽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 밀가루 반죽 같았던 기간 동안 방학이라서 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난, 하지만 계절학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주거지가 필요했던 U와 함께 지냈다.(U의 학교가 우리 집에서 가까웠다.)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함께 살며 내내 같은 방을 썼는데, 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U는 나에게 있어 일종의 엄마 오리 같은 존재이고 심지어 그 시기의 나는 한없이 안정된 삶이 그리운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U와 함께 있다는 사실 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 애가 집을 나섰다가 돌아올 때까지 보통 이불속에 틀어박혀 잠들어있거나 그 자리 그대로 엎드려 미국 애니메이션 ‘어드벤처 타임’을 보며 깔깔대고 있었다. U는 나와 다른 류의 사람이라서, 좀처럼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퍽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지만 날 한심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U가 나를 보는 곤란한 시선이나 조심스러운 제안들이 좋아서 일부러 더 장난 섞인 얼굴로 씩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러면 U가 또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다정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U의 계절학기도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다.


여전히 이불속에 누워있던 어느 날 이제 일어나 걷고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구역질이 날 거 같은 입을 틀어막고 새벽을 보내던 학기 중 보다도 체력이 안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데- 그때의 내 상태란, 어쩌다 한 번 (상대적으로) 긴 외출을 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 두통이 왔다. 거의 항상 부어있었고 피곤에 절어있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을 실감하고 나서야 일어나기로 결심을 했다. 결심을 하기까지 잠복기가 길게 필요하지만 결심을 하고 나면 언제 지지부진했냐는 듯 훌훌 진행해버리는 면이 있어, 그 점이 대책 없다가도 다행이다. 결심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찾아 동네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평범하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겨우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그 해 봄에는 사실 속수무책으로 슬픈 일이 많이 일어났다. 나는 시위에 주기적으로 참여하고, 쓸쓸하고, 슬퍼지고, 그래도 계속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아주 열심히 하고), 비슷한 시기에 잠시 입원했던 엄마의 병실에 찾아가 하룻밤씩을 보내고, 걱정하고, 그러다가도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냥 평범한 하루에 죄책감을 가지고, 여전히 시위에도 계속 나가고, 마음이 아파 울기도 하고 차마 울지 못하기도 하고, 빵을 포장하고 음료를 만들면서, 사람을 끝없이 만나는 일에, 내가 사는 나라에 아주 큰 피로를 느끼면서 봄과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많은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떠올라 글을 쓰며 정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 나만 읽는 글을 쓰다 보면 또 쓸쓸해서 울었다. 그래도 항상 글의 말미에는 여러 가지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글 쓰는 행위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마침표를 찍는 일. 일단 그 순간의 마침표를 찍으면 혼란은 혼란대로 정돈은 정돈대로 나열되어 그 나름의 균형이 잡혔다. 마침표를 찍는 일이 나에게 너무 필요해 뭐라도 계속해서 썼다. 그 나이까지 축적된 모든 역사,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난생처음 혼자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때 떠났던 여행은 돌아보면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가 중요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냥 말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린 날이, 단지 그게 시작이었다. 피로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문득 앙코르와트를 실제로 보고 싶었다. 그게 계획의 전부였다. 거대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대단한 계획 없이 그냥 무작정 가는 일, 보고 싶다고 생각한 장면을 보는 일, 그러다가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무언가 깨닫기도 하고, 문득 너무 아름다운 장면과 마주하기도 하는 일. 그 모든 걸 그 순간에 깨닫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같아. 어떤 여행을 말이야. 대한민국 서울의 한 변두리에 살고 있는 나는 그냥 갑자기 결심하게 되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갑자기 ‘무엇’이 보고 싶다- 고 강렬하게 생각해버리는 그 드문 순간을.


작년 이맘때부터 평야를 보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 맘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야가 보고 싶다고 떠들어댔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땅을 보고 싶다고. 그런 대화 끝에는 한국에서 평야를 보려면 어디 어디로 가라- 던가, 바다로 출장을 와 수평선을 보는데 인애가 떠올랐어- 라는 종류의 마음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한 장면을 상상하며 조만간-하고 시간을 두는 중이다. 잠복기를 지나 결심하게 될 그 날을 기대하면서.


(C) 2019. HanInae. All rights reserved. ㅣwatercolorㅣ평야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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