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엄마 손을 잡고 옆 동네에 계시던 조부모님께 자주 갔었습니다.초등학생인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대학생 사촌언니의 방에는 만화책이 많았습니다. 사촌 언니 역시 만화책을 좋아했고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전공이 미술이었던 언니가 만화책에 채색을 한 덕분에 나름 흑백이 아닌 컬러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가지고 있던 책 중에 김동화 작가의 『아카시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주인공 아카시아를 전생과 현생에서도 괴롭히는 페드라는 아카시아를 제거하기 위해 독사를 유인하는 향이 든 약(만화에서는 사람들은 맡을 수 없고 독사만 맡을 수 있는 향이라는 설정입니다)을 아카시아가 촬영할 옷에 묻힙니다. 그러나 이 악랄한 계획은 사전에 알려지게 되면서 아카시아는 그 옷을 입지 않아 무사히 살아 돌아옵니다. 하지만 페드라는 독사에 물려 최후를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카시아의 옷에 향을 묻힐 때 그녀의 긴 머리칼에 그 향이 한 방울 묻었기 때문입니다.
결말에 해당하는 이 내용은 어렸던 제게 매우 크게 다가왔습니다. 향의 존재를, 그 힘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만화 속 이야기였지만, 처음 이 책을 보고 난 후에 머리를 감으면서 혹시 내게 독사를 유인하는 향이 묻어있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향이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어렸지만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평생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자신의 체취를 맡는 것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이 세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요. 저는 가끔 눈을 감고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어떤 향이 나는 사람이니?”라고요. 페도라처럼 독사를 유인하는 향을 뿜는 사람인지, 아름다운 향으로 좋은 일을 끌어들이는 향을 가진 사람인지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