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4. 2023

그때 하지 못한 말

< 사랑합니다 >

가끔 누군가와 장문의 카톡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참 희한한 것이 주저리주저리 내용은 많은 것 같아도 결국 꽂히는 한마디, 하나의 단어가 있다. 상대가 아무리 그걸 숨기는 척 아닌 척 길게 포장을 했어도 하고 싶었던 말은 다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말을 하려고 문장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별에 대해 소재를 떠올리고 글들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도 궁극에 하고 싶었던 이별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글꾸러미를 정리하고 모으다 보니 뭔가 부족해 보였다.      


시간이 지났지만 새삼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간직하기도 뭐 해 그냥 서랍에 넣고 잠가 버린 유행 지난 귀중품 같은 내 이별 이야기.      


아버지를 많이도 원망했다. 그가 내 인생을 힘들게 한 주범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 엄마를 괴롭혔다거나, 바람을 피우셨다거나, 폭력적이거나 도박 등의 유흥을 일삼았다거나, 그런 분은 아니었다. 당신의 방식이었지만 나름 딸을 예뻐하셨고, 풍족한 건 아니었지만 무남독녀였기에 가난했던 기억도 없다. 아버진 한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 충분한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다만, 나의 이십 대를 꼼짝도 못 하게 꽁꽁 묶어 놓으셨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에 들어갈 때 쓰러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 다시는 건강한 삶을 찾지 못하셨다. 그는 내가 스물한 살 때 쓰러져서 내가 서른네 살 때 돌아가셨다. 십 오 년 동안 나는 효녀인 척 살았는데 그 십 오 년은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우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졸업을 하기도 전부터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죽을 만큼 일을 해야 했다. 성장기 때는 무남독녀인 것이 참 좋았다. 그런데 부모님의 불행을 같이 나눌 형제가 없어 나는 늘 고독했고 힘겨웠다. 친구를 만날 시간, 취미를 배울 시간, 여행을 갈 시간 같은 건 사치였다. 제발 한 달만이라도 쉬어보고 다음 직장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그 한 달 동안의 월급이 아쉬워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 부성애의 부재 때문이었는지 나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니면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결혼도 아버지의 요구에 떠밀려서 하게 되었고, 준비 없이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늘 아버지 병원과 집과 회사를 오가며 별로 즐거운 일 없이 아버지의 긴긴 투병생활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새벽에 받았는데 가슴에 무언가가 뻥 뚫리면서 전쟁이라도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응급실을 오가던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그리하여 나의 지긋지긋한 라이딩도 끝이 났으면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같이 졸업한 친구들은 저만치 앞서서 나보다 더 근사한 회사에 아니면 있어 보이는 유학에 그도 아니면 알만한 집에 시집을 갔다. 무엇이든 뒤처져 있는 나 자신의 꼴이 당연히 아버지 탓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웃음을 잃은 이십 대를 보냈다. 또 그런 원망이 어떨 때는 죄책감으로 돌아와 집 나가서는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구경은 부러 택하지도 않았다. 나만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눈물도 나지 않아 사람들은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십오 년 동안 죽도록 무언가를 했기 때문인지 공부도 일도 연애도 후회 없이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의 치열했던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오십이 넘고 아이들 다 키우고 시간적, 경제적, 물리적 여유가 생기고 보니 잠가놓고 잊어버린 그 옛날 서랍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후회가 되는 순간. 나는 실컷 원망만 했지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같이한 시간도 많았는데 나는 도망쳐 나오기에 급급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퇴원해 목욕을 마치고 편안해 보이셨다. 어쩐 일로 전복죽을 다 드시고 편히 잠드셔서 나는 이제 또 두어 달은 편하겠다 싶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이 십 년이 지났는데 나는 요즘 아버지의 죽음이 처음으로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토록 모진 세월을 살아내신 아버지의 인생이 가엽다. 어린 여식을 두고 속절없이 투병 생활만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흥이 많았던 아버지의 꺾여버린 사회생활이 안타깝다. 어느 날인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는 흰색 런닝을 입고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계시던 뒷모습을 보고 섬뜩했던 적이 있다. 굽어진 등으로 얼마나 한 좌절을 하셨을까.      


조금만 더 따스한 눈빛으로 안아드리고 왔어야 하는데 나는 끝까지 차갑고 서늘했다.  마지막 가는 길, 온기라도 가져가시게 했어야 하는데 설마 돌아가시겠나 싶었다. 아직은 멀었다고, 아직은 아니라고 말이다. 


아버지, 아팠던 세월 다 잊으시고, 부디 편안히 지켜봐 주세요.

중학교 3학년 때 둘이서 서울대공원 갔던 거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우리 나들이 

오래오래 기억할께요.     

사랑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닫혀버린 문 앞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