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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7. 2023

두고 온 비닐 봉다리

< 새벽의 사람들을 그리며 >

그땐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이젠 영영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길 가다 마주쳐도 서로를 몰라볼지도 모른다. 

우린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던 것일까.      


여성 보세 옷 매장을 운영하면서 동대문에 사입을 하러 다닐 때였다. 동대문 의류 도매 상가는 밤 12시에 오픈한다. 그때 나는 집에서 열한 시에 출발했다. 차를 운전해 시장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나는 전투 모드에 들어간다. 남들 자는 시간에 눈에 힘을 주고 어깨를 풀지 않고 걸음걸이는 빠르고 힘차게 사입할 옷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다.      

시장에 가면 커다란 대봉을 어깨에 둘러메거나 혹은 땅에 질질 끌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양을 이고 지고 하면서 사람들은 밤을 새워서 자신들이 돌아가 팔 옷들을 주워 담는다. 어떤 날은 누가 떨어뜨리고 간 것인지 두어 개 비닐봉지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자신의 봉지와 이별하게 된 사장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인식하지 못한다. 다음날이나 되어야 아차 싶겠지. 얼마나 안타까울까 얼마나 봉지가 많았으면 그만 누락된 것일까 싶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땅에 떨어진 누군가의 비닐봉지를 동대문에서는 아무도 줍지 않는다. 다들 물건을 놓쳐버린 그 사장님이 다시 돌아와 무사히 찾아가기를 바라서일까.      


그렇게 정신없이 도매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새벽 4시쯤 비닐봉지들은 도저히 두 손으로는 들지 못할 양이되고 만다. 나는 그제야 대봉을 질질 끌고서 상가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정 분량 주차장에 가서 물건을 싣고 다시 상가로 돌아올 시간과 체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라도 더 사 가지고 오겠다는 욕심 때문에 중간에 멈추지도 못하고 마침내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린 적이 있다. 오 미터만 더 걸으면 차가 있었는데. 앉으면서 비닐봉지 하나가 풀어져 옷가지들이 땅바닥에 튀어나와 널브러진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튀어나온 내장들 마냥 놀랍고도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주워 담으면 될 것을 왜 그랬는지 눈물이 나려는 것이다. 보다 못한 주차장 아저씨가 비닐과 옷가지를 차에 실어 다 주셨다.      


사입을 처음 해보는 내가 주말 오픈 시간을 잘 몰라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도매상가는 토요일 아침 6시까지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 특히 마지막 토요일은 새벽 세시부터 도매 사장님들의 휴식 시간인지라 모자란 잠도 자고 자기들끼리 음식도 나누어 먹고 한다. 그날따라 깜빡 잠이 들어 늦게 출발한 데다가 시장에 도착하니 주차할 자리도 없어 다른 블록에 주차를 하고 부랴부랴 상가를 돌아다녔다. 그 관행을 알리 없는 나는 텅텅 비어 있는 매장들에 의아해하며 어느덧 4시가 된 것이다. 사입을 하지 못해 당황해하던 나를 보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도매 사장님이 내 손을 잡았다.      


같이 먹고 가요, 우리는 이게 파티야.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엽기떡볶이였는데 살면서 먹어본 떡볶이 중에서 가장 매웠다. 다른 음식들도 자극적인 메뉴들로 차려져 있어 손이 가지 않았는데 어찌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이런 걸 먹어야 장사의 매운맛을 알게 된다며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 중 소매 사장은 나밖에 없었다. 내친김에 소주도 받아 마셨다.      


엊그제 우리 상가에서 젊은 부부가 동반 자살을 했어요. 이삼일 커튼이 젖혀지질 않아서 이상하다 했지. 그래서 요즘 완전 초상집이야.      


아직 한창인데 조금 더 살아보지. 지나가면,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다른 사람, 다른 기회가 올 수도 있는데 조금만 더 견뎌보지. 속으로 그렇게 답하며 술잔을 받았다.      


그 시절 나는 책상에 앉아서 편하게 일하다가 갑자기 몸을 쓰는 일을 하자니 아주 간단한 행동도 어색하고 표정 짓는 것도 어렵기 짝이 없었다. 살다 보니 어느 새벽에 그때 매일 만났던 사람들이 야시장의 불빛처럼 반짝일 때가 있다. 언제나 힘내라 해주신 주차장 아저씨, 김밥 아주머니, 요구르트 아줌마, 박카스 언니, 어묵 아저씨, 택배 삼촌, 그리고 도매 사장님들, 그들은 내가 매장을 그만두면서 자연스레 다시 볼 기회가 없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회사라는 직장, 안온한 사무실이라는 어엿한 공간이 주어지는 곳에서 함께 밤새워 일한 동료들도 궁금하긴 하지만 가끔은 여기저기라 기억도 나지 않는 시장 사람들이 그렇게 그립다. 손과 손을 건네며 주고받았던 확실한 물건들이 있어서 그랬을까. 직접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 투박했지만 마음만은 따스했던 사람의 온기, 그리고 정을 느껴버려서일까.      


그러던 나도 언젠가 그만 시장 바닥에 신상이 들어 있던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두고 온 내 마음 한 자락 마냥 활기찼던 새벽시장의 발걸음 소리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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