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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기획자의 메모리노트 4 :

행복한 기획자로 살기

고통이 즐거움으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여성이라면 나는 당신의 기획 일이 당신에게 행복감을 주는 일이길 바란다. 기획자가 된 것이 여성으로서 힘든 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획이라는 일은 업무 프로세스 상 서두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챙겨야 한다. 기획자의 업무는 개인 역량에 따라 하기에 달린 일이라 사람에 따라 기획의 범위도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자료조사와 벤치마킹, 분석 위주로만 문서를 작성하면서 당당히 기획자라고 한다. 어떤 기획자는 사업의 발주처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들의 안을 설득하는 일까지 마무리 짓는다. 물론 회사의 규모와 일의 특성상 업무의 범위는 다르겠지만 기획자의 개인 역량이 그가 하는 기획의 범주를 결정짓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능력 있는 기획자가 여성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희생해야 할 영역이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성으로 살기도, 기획자로 살기도 힘들다. 하여 여성 기획자는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성과를 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워커홀릭으로 비치거나 독종, 냉혈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닐 수도 있다. 조직에서 주목을 받거나 윗사람들의 총애를 받을 경우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어 외톨이가 될 수도 있다, 기획자는 어느 분야보다 회의도 많이 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혼자서 고독을 벗 삼는 직업이다. 혹시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일 잘하는 나에게 비협조적인 구성원들이 있다 싶을지라도 그건 내 탓이 아니다. 그렇다고 독야청청, 유유자적, 혼자만 난척하며 그들을 무시하라는 건 아니다. 기획은 무엇이든 성공해 내었을 때 가장 빛을 발하지만 실패했을 때 책임도 크기 때문에 언제나 그 무게만큼 관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양날의 검 같은 직업을 택했기에 소소한 인간관계에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절대 조직의 인간관계에서 반응형 인간으로 살기보다 관람형 인간으로 살지어다.      


  여성은 기획에 참 적합한데, 세상은 여성이 기획하기 가혹하다.      


  기획자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대를 설득시키고, 반대의견이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논쟁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이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남성중에는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적이지 않은 구성원들이 반드시 발생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나름의 논리적인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속으로는 주장이 강한 스타일의 여성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남성들이 거기에 속한다. 여성들도 같은 여성이 주목을 받는 일을 불편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성은 결혼을 해도 눈치를 보고, 결혼을 안 해도 눈치를 받는다. 어떤 후배는 자신이 한 프로젝트를 끝낼 때마다 사방에 적들이 계속 곱절로 증가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한다. 그리하여 기획을 하는 일 자체가 행복은커녕, 결과적으로는 힘들고 우울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일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감정적으로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경력은 많은데 점점 차가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머리만 차가우면 될 일을 가슴까지 얼어붙어 어느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는 모난 돌이 되기 십상이다. 날카로운 기획을 하는 것과 날카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어떻게든 먼저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일이 중요하다. 성급한 마음에 남의 성취를 가로채거나 몰래 복제하거나 대충 할 버릇을 들이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한번 맛본 편리함 때문에 그다음은 절대 수고와 정성을 기울이지 않게 되어 있다. 이만큼 쌓아놓은 실력마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 불을 보듯 선하다. 여성은 실력자로 평판이 나야 회의 테이블에서 존중받는다.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회의를 해서는 안 된다. 회의는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 다 들어보고 누군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미리 모든 걸 준비해서 전달하고 그것에 동의를 얻는 시간이라 여겨야 한다.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공격하기보다 될 수 있으면 끌어안고, 그 사람의 입장과 생각에 공감을 하는 것이 마음 편한 사람들이 있다. 여성으로서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해 누구라도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1906∼1975)는 여성이 자궁이라는 신체기관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나 아닌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여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디는 유전자가 바로 공감능력을 높이게 했다는 주장이다. 포용하는 기획자의 단점은 전략의 칼끝이 예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모두의 의견을 종합한 안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고 평범한 결과가 도출되기 쉽다.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무디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변에 사람은 좋은데, 성과는 별로인 분들이 떠오를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진심으로 참여한 다른 이의 생각에 공감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클라이언트, 회사 임원, 직속 상사, 부하 직원, 협력체 담당자, 자문 교수, 진지하게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찬성, 반대, 우려, 응원, 침묵 등의 다양한 의견에 공감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침으로써 결과에 따른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답은 진정성에 있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나의 직관에 따른 판단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진정성을 공부하고 연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 정직하고 뜨거운 그 진짜 마음을 가지고 일을 대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이야기할 때, 그 직업이 행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업무가 있다. 예를 들어 콜센터 직원이라면 전화를 걸고 받는 행위가 가장 핵심적인 업무이다. 그 본질적인 순간이 괴롭고 싫다면 그 직업은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한들 절대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내가 하고 있는 기획업무 중 반드시 내 손으로 내 머리로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면, 그것을 수행하고 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인지 면밀히 살펴보시라. 자꾸 회피하고 다른 이에게 넘기는 버릇은 없는가. 처음엔 어려웠지만 그 순간의 반복이 모여 실력이 되고 전문성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고통의 순간은 나만의 즐거움이 되는 날이 온다.      


  일의 행복은 가장 어려운 순간을 통제하는 데 있다.     

 

  일이 좋은데 사람들이 싫다거나, 일은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어렵다거나, 일은 쉬운데 사람들이 지겹다는 것은 결국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이지 일의 본질적 어려움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이것을 일 자체가 어려운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참 힘든 사람일지 모른다. 굳이 타인은 지옥이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 업계만 특별히 못되고 나쁜 사람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다른 분야도 똑같다. 외모도 경쟁력 있고, 일은 물론이고, 성격도 원만하고 전 직원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가끔은 누이처럼 포근하고 또 더러는 여동생처럼 애교까지 부리는 그런 여직원은 애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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