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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달력에 제일 먼저 표시할 것

< 기획자의 저녁_4 >

디파짓은 영어로 Deposit인데 착수금, 보증금이란 뜻이다. 주로 외국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 일정금액의 예약금을 지불하는 것을 디파짓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계획한 여행상품에 내가 돈을 미리 지불해 놓자는 것이다. 물론 여행 상품은 내가 만든 것이니 안 간다 해도 손해는 없다. 대신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는 것에 굳이 미리 돈을 빼놓는다는 것. 이것은 미래 어느 시점에 갈 여행을 위해 저축을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내 계획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나 자신의 의지를 더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한가한 저녁 달력을 보며 내년도 여행 스케줄을 그려본다. 이때의 여행은 박물관 벤치마킹이나 해외 신규시설 탐방 목적이 아니다. 일 안 해도 되는, 일 버리고 가는, 일 없는 여행인 것이다. 여행 일자를 미리 정해 놓고 그때는 세상없어도 휘리릭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번 일만 끝나고 가려던 그 생각 때문에 절대로 여행 갈 시간이 생겨지지 않는다. 여행은 다 끝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해진 날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갔다 와도 일이 무너지거나 사라지거나 내가 업무적인 불구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코로나 시기에도 몇 번이나 코를 찔러가며 두바이, 아부다비를 다녀왔고, 미국에 몇 번이나 한 달 이상씩 체류하면서 할 일을 다 했다. 내가 한국을 비운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거나 또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처럼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이력에 어떤 결격사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인적인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플랜이겠지만, 요 몇 년 동안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새로운 달력을 받으면 무조건 여행 일정을 정한다.”     


  여름이나 방학 휴가철엔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본다. 홈쇼핑 여행상품은 너무 대중적이라 썩 마음에 내키지가 않고. 명절을 끼고 가면 한국에서의 일상이 영향을 받으니 좀 그렇고. 프로젝트는 대체 언제가 정확히 끝나는 시점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고. 이래저래 달력을 아무리 넘겨봤자 여행일정을 미리 잡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을 놀러 가는 여행으로 여기지 말고 일 년에 필수적으로 마치고 와야 하는 중대한 점검의 날이라 생각해 보시라. 일단 그 날짜들은 빼고 일을 하게 되고, 거기에 맞추어 일을 끝내게 된다. 쉬는 날을 정해놓고 숙제처럼 쉬어보자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일 년 중 여행 일정을 미리 빼놓고 일하는 사람들은 무슨 재벌들이나 부자들만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시절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달라졌다. 해외가 여의치 않다면 국내도 얼마든지 좋다. 중요한 건 일할 날이 아니라 쉬는 날을 먼저 정하는 데 있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평소에 일을 열심히 하다가 여름에 가족들과 여행을 떠난다’, 는 이 진부하고, 보편타당해 보이는 문장조차도 부지런히 실천하며 살지는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 3, 4년 차였을까. 그러니까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 시기 3박 4일의 여름휴가는 거의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모자하나 달랑 쓰고 드라이브 간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 계곡이었다. 이런데 와선 발을 담가야 제 맛이라고 먼저 시범을 보인 아버지. 그리고 언제 준비했는지 참외랑, 수박도 주섬주섬 꺼내던 엄마가 계셨다. 그날 나는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정강이를 난생처음 보게 되었는데 무릎 위까지 걷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아버진 생각보다 단단했고 활기찼다. 아버진 잠시 젊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꽤 맑은 계곡 물에 참외랑 수박을 담그시던 손놀림도 기억난다. 그때 나는 계곡물이 얼음물보다 차갑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졸다가 끌려 나와 머리까지 시원해지던 그 순간은 내 생애 ‘별것 아님에도 잊히지 않는’ 찰나의 순간으로 남았다.
 
   어디선가 불어오던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손과 발이 서로 재잘거리며 물과 부딪히던 소리를 기억한다. 발은 차갑고 손은 분주했으며 머리는 개운했으나 가슴은 더워지던 그날, 그들, 그리고 나. 그날은 우리 세 식구가 소박한 여행을 떠나 아무 말 없이도 웃기만 한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린 어디로 떠나지 못했고 떠났다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없었다.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이 정말 그때였는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자기 식대로 조금씩 조작되고 편집된다. 그때가 정말 마지막이었나 싶어 곰곰이 따져보니 두어 번 더 있었던 거 같긴 한데 기억날 만한 장면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날이 내겐 마지막이라 저장된 내 기억의 여행인 것이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던 것을 그땐 몰랐다.      


  올해는 아빠랑 일본에 가기, 내년엔 엄마랑 미국에 가기, 혼자 유럽 떠돌기, 이런 플랜도 기획자에겐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군가 주장했는데, 저녁에 꼭 무엇을 해야 충만한 하루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획자의 저녁은 아무리 쉬고 그만 잊으라 해도 숙명적으로 미래를 그리게 된다. 어제를 기획하는 일은 없다.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이 기획자의 일상일 것이다. 기획을 잘하기 위한 방법이 따로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침엔 몸과 정신을 깨우고, 오전에 풀로 뇌를 가동하고, 맛 좋은 점심을 먹고, 자신 있게 회의를 하고, 차분히 저녁을 정리하는 것이 전부이다. 매 순간이 그다음 순간을 이어 주기 때문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이 하루하루가 쌓여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나는 오늘도 오후를 지나 저녁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글을 쓰면서 더욱 쉽지 않은 기획의 길을 잘 찾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저녁시간에 수많은 고민을 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내일도 계속해야 하는 저녁의 고단함은 반드시 언젠가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바뀌게 된다. 그때라면 아마 일이 끝나서가 아니라, 내일이 기대되기 때문에 저녁이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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