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8. 2023

벤치마킹

< 기획자의 나머지 시간_2 >

 일본을 서른 번 정도 간 것 같다. 어느 시기까지 우리에게 미국은 너무 멀고, 유럽은 정서가 달라 가까운 일본만 따라 했다. 자존심상하지만 그땐 일본이 선진국이고 우린 후발주자였으니 만들려고 하는 박물관은 이미 항상 일본에 존재해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의 장점을 잘 버무려 아기자기한 전시연출을 잘 구사한다. 더구나 내가 이십 대일 땐 인터넷이 전화통신 수준이었고, 박물관마다 홈페이지도 없었다. 무조건 날아가 사진을 찍는 것이 제일 빨랐다.      


  그런데 회사의 돈으로 해외를 온 것이니 운영비를 아껴 하루에 최소 세 개의 박물관은 보아야 했다. 말이 쉬워 세 개지, 박물관 오픈하자마자 관람을 시작해도 클로징 하는 5시 전까지 지역을 이동해 가며 정보를 담아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숙소에서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나갈 땐 미션을 다 수행하면 근사한데라도 들어가야지 하지만 결국 지친 채로 돌아와 쓰러져 잘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길어야 4박 5일인데 그렇게라도 콧바람 쐬며 외국을 가는 것이 좋았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 우리는 출장을 핑계 삼아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그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카탈로그며 도록, 포스터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다녔던 시절을 생각하면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점이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 버려서 부러 박물관을 답사하자고 일본에 가지는 않는다. 또 온라인 박물관, 360도 VR 투어 등을 통해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는 루트가 있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도 한때는 제안서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일본에 먼저 가서 벤치마킹을 하고 기획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직접 발품을 팔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보면서 자신감도 얻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더 좋은 안을 만들어 내겠다는 다짐도 하면서 말이다.      

LA 홀로코스트박물관 (2022.8)
LA 홀로코스트박물관 한국어 가이드( 2022.8 )

지금은 미국의 웬만한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한국어 버전의 브로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LA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정도만 되어도 오디오 가이드 앱에 한국어 버전이 설치되어 있다. 내 핸드폰과 이어폰만 있으면 동선을 이동하면서 친절하게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다. 


LA 관용박물관 세미나룸 ( 2022.4 ) 

  최근에 인상 깊었던 박물관은 리노베이션 하면서 주목을 받은 LA 관용 박물관이다. ‘관용’이라는 무척 다루기 힘든 추상적인 테마를 가지고 박물관의 의도대로 끝까지 주제를 밀고 나간다. 본 전시 관람 후 우리로 보자면 아직 미취학 아동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세미나룸에서 진지하게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박물관 전시산업 전문가들은 보통 미국 동부의 워싱턴 스미소니언 뮤지엄,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을 먼저보고 서부로 날아와 샌프란시스코의 익스플로라토리움, LA의 자연사나 게티 센터를 보고 돌아간다. 이렇게만 보아도 시차나 거리 때문에 너무 힘들다. 미국은 관광지가 아닌 곳에 중간 규모의 박물관이 곳곳에 위치해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너무 알려진 박물관 보다 중소규모의 박물관을 꼭 추천하고 싶다. 미국은 콘텐츠의 힘이 강한 나라다. 뉴욕의 스파이 뮤지엄에 설치된 도입부 미디어 테이블을 보면 스파이로서 기초적인 자질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암호를 맞추어 보는 퀴즈를 풀도록 되어 있다. 아이들이 재미가 있다 보니 초집중하면서 미디어테이블 앞을 떠나지 않는다. 여러 번 시도하면서 답을 알아 가다 보면 정말 생각을 많이 하고 콘텐츠를 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땅이 넓고 동선이 길다 보니 무엇이든 종합적으로 보여줄 것 같아도, 그 논리는 반대로 동선이 짧고 면적이 좁은 우리나라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어떤 특정 주제의 박물관을 각 시마다 건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번 만들 때 모든 걸 언급하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박물관 말고도 볼 것이 너무 많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집중적인 관람이 되기 힘들다. 한 번은 프랑스의 파리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해양박물관을 보고자 우리 팀이 테제베를 타고 도착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같이 합류한 선배도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 가서야 현재 리모델링 중이라는 입간판을 확인한 적도 있다. 어이없지만 그땐 그랬다. 사실 빠듯한 시간 안에 구석구석 사진을 찍으면서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충분한 관람이나 감상보다는 일단 온 김에 마구 정보를 쓸어 담기 바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나중에 돌아와 사진을 클릭하면서 돌려봐야 그제야 이런 곳이 있었나 기억이 나기도 한다. 많은 걸 보겠다는 욕심에 오전도 오후도 꽉 채워 관람을 하기보다는 하루에 하나를 보고, 나와서 그 주변과 도시를 함께 느껴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 시카고를 방문했다면 오전에는 과학산업박물관을 보고 오후에는 크루즈를 타고 시티투어를 하는 것이다. 왜 그런 전시물이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 (2022.8)

  기획자에게는 엑스포를 개최하는 도시도 참 매력적인 벤치마킹 대상이다. 2020 두바이 엑스포는 코로나 때문에 1년이 연기되어 2021년에 오픈했다. 한참 코로나 검사가 필수이던 시기였지만 오픈하자마자 두바이를 방문했다. 그래야 파빌리온 마다 두어 시간 줄 서는 고생을 피할 수 있다. 대신 후기들이 올라온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일일이 몸으로 부딪히고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수고가 많다. 나는 영화도 가급적 개봉하는 날 보는 편인데 아직 아무도 보지 않아서 누군가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좋다고 하니, 좋아야 하니까 좋다고 느끼려 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나도 같은 편이라는 걸 알려야 할 때 남들의 평가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떠든 적은 없는가. 기획자는 자기가 본 느낌대로 남에게 솔직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세월이 지나 무엇이든 나의 평가에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신뢰를 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주관이 뚜렷한 기획자일 것이 분명하다.      

2020 두바이 엑스포 이동성구역 주제관 (2021. 10)

  세계적으로 5년마다 한번 열리는 공인 엑스포는 회사에서 지원을 안 해 주더라도 꼭 개인 돈과 시간을 내어서 봐두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2년은 마음이 편하다. 엑스포 관람 후 3년째가 되면 아마 다음 엑스포의 한국관 참가에 대한 계획을 준비하게 될지 모른다. 나 역시 두바이 엑스포 한국관의 전시설계 공모에 참여해 제안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입찰에 참여한 해당 업체가 평가에서 1위를 하여 최종 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도 협상이 결렬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게 되었다. 늘 아쉬운 마음이 자리했고, 그래 어떻게 잘했나 한번 보자는 마음도 강했다. 두바이 엑스포 회장에 들어서서는 한국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은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참 반가웠다. 우리나라가 역대 최대 규모로 참가한 것이었는데, 미국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보다 좋은 위치였다. 두바이 엑스포를 보고 선진국은 어떤 나라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감명 깊었던 국가관은 독일관이었다. 아예 새로운 에너지 과학관을 하나 건립한 것 같았던 독일은 선진국이 맞았다. 최첨단의 기술이나 과거의 자랑을 뷔페처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다음 세대가 놀고 배우도록 하면서 알게 하는 독일의 스토리 전개가 너무나도 근사해 보였다.      


  엑스포는 전 세계 인류 활동의 광범위한 부분에 걸쳐 달성된 진보적인 이슈와 최첨단의 기술이 한 곳에 모이는 이벤트이다. 과거 93 대전 엑스포는 아쉽게도 인정 엑스포였다. 꿈돌이의 여행에 대해 시나리오 아르바이트를 할 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리고 오픈하는 첫날 아침, 번영관 어느 한쪽 구석에서 빗자루로 청소를 했다. 마지막 날까지 밤을 새워서 부스가 완성되었는데 지금이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땐 피를 말리는 밤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시산업은 93년 대전 엑스포 이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 것이니 내 개인의 전시 경력이 사실상 전시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2025년에는 오사카에서 엑스포를 개최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2030 엑스포 개최도시로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내 인생에서 기획자로서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공인 엑스포의 계획과 실현에 조그만 기여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말하는 대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이 오는 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