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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관련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를 본다

< 기획자의 실무_3 >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도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소위 말하는 그 한방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적용했는데도 어쩐지 내 가슴에도 와닿지 않을 때. 그럴 때는 바깥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겐 이상한 법칙이 있다. 그 전날 ‘이순신’ 관련 프로젝트를 오래 생각하다 보면 꼭 그다음 날 아침 뉴스나 유튜브, 아니면 인터넷 포털에 ‘이순신’과 관련된 기사가 뜬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내가 이순신 생각만 하다 보니 그 정보가 눈에 먼저 띄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연유에서건 오래된 기획자인 내게 존재하는 오래된 법칙이다. 그래서 혹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큰 걱정을 안 한다. 때가 되면 내게 운명처럼 다가오는 단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구성안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영화를 보면 한창 눈과 귀를 쫑긋하고 보기 때문에 반드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호국에 대한 전시관 제안서를 만들고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하이라이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그린 <한산 : 용의 출현>이 개봉을 했다. 국내에 이순신 관련한 전시관은 무수히 많다. 그만큼 호국영웅으로서 이순신은 너무나 진부해 별다른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순신을 등장시킨다고 하여 호국에 대한 마음이 특별히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영화를 본 이유는 호국영웅에 대한 웅숭깊은 마음이 생기지도 않으면서 관성적으로 제안서를 써대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였다. 한산도 앞바다,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조선의 운명을 건 해상 최고의 해전, 명량이라는 영화를 익히 잘 알고 있어서였을까. 기대하지 않고 좌석에 앉아 사실 도입부는 졸면서 봤다.      


  졸음을 깬 장면은 ‘둥둥둥’ 전투 신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물론 연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겠지만 학익진의 대열이 나타날 때도 가장 심장을 두드리던 건 웅장한 배경음악이었다. 적군의 배에 밀착해 기회를 포착한 다음 쏘아대는 화포와 하필 그때 열리던 거북선의 원형 문도 인상 깊었다. 거북선 내부에서 배를 조종하는 능로군의 사력을 다하는 노젓기도 영감을 떠오르게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능로군에게는 하루 종일 어떤 일도 시키지 않고 거북선 노젓기만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 둔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최고치의 모습을 겹쳐서 보게 된 것 같았다. 가장 아쉬운 건 제안서라는 사실상 2D 매체에 사운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인데, 호국의 진정성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 결국은 음악이구나를 실감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국뽕이 차오른다’는 세간의 말처럼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마치 내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이 기분을 잊어버리기 전에 팀원들에 전화해 한산을 꼭 보라고 전했다. 아울러 가장 핵심공간에 학익진 하이라이트 퍼포먼스와 전시 체험 아이템을 추가했다. 마지막 상영시간에 영화를 본 것이라 몸은 피곤했지만, 결국 2%가 부족했던 그 무엇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노력과 상관없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가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엔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식의 고전적인 답변을 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잘 안 되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찾아오는 상황이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된 적이 있지 않은가. 최근엔 ‘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다가오지 않은 운은 나중에 부메랑처럼 돌아온다.’와 같은 말을 해준다. 성공한 작품만 뽑아서 모아 놓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생 매번 작품을 성공했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위로에도 소위 우등생으로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를 맛본 경우,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공부한 만큼 시험점수가 정확하게 비례했던 기억 때문이다.      


  나로부터 일어나지 않은 변수를 통제하기도 어렵고, 그 변수에 의한 의외의 결과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또 1등을 한쪽은 자신이 왜 1등을 했는지 알지만, 낙선이 된 입장에서는 왜 자신들이 선택을 받지 못했는지 대개 알지 못한다. 그래서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늘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구에게 평가받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는지는 본인이 가장 제일 잘 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안 좋더라도 희한하게 후회가 없게 된다. 최선을 다했으니 억울할 것 같아도 순간적으로 드는 그 감정은 진한 아쉬움이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경우, 결과가 안 좋으면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것이고, 결과가 좋아도 혹시 나보다 더 최선을 다한 누군가의 운을 빼앗아온 건 아닌가 싶어 썩 개운치가 않다. 대충 쓰고 대충 그린 것은 결국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락과 상관없이 잘된 제안서는 오래오래 레전드로 남게 된다.      


< 멀티플렉스 호국관 전시설계 및 제작설치 제안서의 전시연출 >

맞은편 루프 무대에 북, 징, 나발을 상징하는 키네틱 조형물을 연출하고 비상, 동기, 전진의 3단계로 학익진의 대열을 완성하도록 함.

중2층 복도에서 거북선처럼 뚫린 원형구에 미디어스코프를 조준하면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 함께 루프에 위치한 키네틱 조형물들이 반응하도록 함.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나라를 지켜온 호국정신의 총체를 의미하는 어른의 대형모형과 내일을 이끌어갈 어린이 모형이 마주 보게 하여 관람객과 함께 미래융합 퍼포먼스를 연출     


   감성이 메말라 있는 상태에서는 감동을 제공하는 연출이 당연히 생길 리 가 없다. 그런데도 이성만으로 작업을 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지금은 자료가 없어서, 혹은 찾을 수가 없어서 못 본 다기보다는 홍수처럼 넘치는 정보의 방대함에 짓눌려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무엇이냐 질문을 하면,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고 답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본 영화를 다 통 털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작 최근 3개월 정도의 정보 양으로 통계를 내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요즘은 지나간 영화나 드라마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 구간별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허리우드의 미래 SF 영화도 미래 존을 연출하거나 기후변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연출할 때 꿀 팁이다. 뮤지컬 무대 연출도 제한된 공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뜻밖의 아이디어를 채집해 놓을 수 있다. 누군가 먼저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풀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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