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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해당 학문을 전공한 대가를 찾아가 물어본다

< 기획자의 실무_6 >

  98년도 즈음 내가 전시기획이라는 일에 아주 많이 지쳐있을 때였다. 생태 및 환경 전시관 건립 건으로 자문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겼다. 당시에는 전시 기획자들이 콘텐츠를 구성하기 전에 필히 해당 분야 교수에게 자문을 받는 것이 기획단계 필수 과정 중 하나였다. 그땐 교수들이 주로 심사 위원이었고, 그들은 전시 전문가들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획자인 나도 교수들을 부러 만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 분야에 조언을 해줄 교수를 찾던 중 당시에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더 유명한 최재천 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땐 최재천 교수가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재임 시절이어서 서울대로 향했다.      


  질문의 수준이 곧 질문자의 수준이다. 


  기획자는 자신이 공부한 만큼만 질문할 수 있다. 기획자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걸쳐 넓지만 얕은 지식을 쌓아 놓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공 교수와 미팅을 하려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준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바쁜 교수들은 자문받으러 온 친구가 얼마나 열정을 다해 공부했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그래서 질문하는 걸 보고 나서 자신의 보따리를 푼다. 교수와 만나서 오래 시간을 가졌다면 그 교수는 기획자로부터 동기부여를 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된다. 교수들은 대체로 자기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하고는 한마디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시 최재천 교수의 방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인상 깊었던 것은 책상의 양 끝에 좌우로 교수님의 머리높이까지 문서들이 쌓여 있었고 회의테이블에도 흡사 서점처럼 책들이 즐비했다는 점이다. 물론 모두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도시에도 나무가 필요한 이유를 아주 진지하게 자신의 가족이야기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불쑥 찾아온 내가 무엇이 반가웠겠는가. 하지만 기후변화나 환경 문제에 열정을 가진 내가 기특했는지, 전시관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꽤 오랜 시간 인터뷰를 허락해 주셨다. 덕분에 교수자문에 대한 편견도 사라진 날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아무리 유명하고 바쁘고 소위말해 장안에 대가니 석학이라고 하는 분도 실제 만나서 진심과 열의를 보여드리면 마음의 문을 열고 나보다 더 열심히 프로젝트의 본질에 도움을 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다가 도저히 혼자 해결이 안 되면 그 분야의 대가를 찾아가시라. 진심과 열의는 사실상 사전에 많은 공부를 해놓아야 겨우 드러나기 마련인데 일단 공부한 것을 검증도 받을 겸 말이다. 교수들은 질문자의 질문의 온도와 그 깊이를 보고 이메일로만 답해도 될 것을 얼굴본 김에 자료를 주고 싶어 한다. 만나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은 연락을 해보고 좇아 간 다음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만나주지 않았다고 손해 볼 것도 없다. 그 교수가 아니면 다른 이를 찾으면 된다.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해야 답이 나오는지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기획자는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오는지도 스스로 알아내어야 한다. 

  

  물론 작업시간은 늘 빠듯하고 때로는 자문이 독이 될 때도 있다.  자문이 어느새 정해진 답이 되어 창의적인 생각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기 단계보다는 어느 정도 내가 생각이 정리된 다음 구상안의 확인차 자문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세월이 한참 흘러 어쩌다 모교에 계신 전공 교수님을 만나러 갈 일이 생겼다. 처음엔 전화로 이것저것 질문을 했는데 나의 적극적인 구애로 드디어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그날은 함박눈이 내려 시내 교통상황이 엉망인 날이었다. 그는 오래된 건물 조용한 연구실에서 마치 박제된 사람처럼 한 분야의 학문을 30년째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아도 겸손함을 잊지 말라고 늘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저러한 내용들을 공부했는데 아무래도 짧은 시간 동안 전체를 파악하려니 감당이 되질 않아 급한 마음에 해당 분야 전문가이신 교수님을 찾아왔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갈 때는 준비한 것을 선별하려들지 말고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의 결과를 가져가야 한다. 항상 강조하지만 회의나 만남에서는 그날 이야기 하려는 주제보다 훨씬 더 많이 앞질러 준비해 가져가야 하는 것이 기획자의 자세이다. 교수들은 자기 앞에 온 사람이 얼마나 아는 가를 살펴본 후 그 정도에 맞게 답한다. 나름의 점검이 끝나 학문에의 순수와 진정성만 입증된다면 사심 없는 교수들의 경우 대개 기대이상의 자문을 해준다.      



  “제가 더 배운 것이 많네요.”     


  이 분야의 최고 연구자인 한 사람을 설득시키고 공감을 받아내었다는 경험은 기획자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는 30년 연구했지만 나는 한 달도 채 하지 않은 고민 아닌가. 학번을 따져보니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도 않아 동시대를 살았던 동창으로서  그 시절을 함께 소환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수님과 나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두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구상한 기획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우리는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고, 오늘 박물관 때문에 처음 만난 사이지만 같은 주제로 오래 고민해 온 동지처럼 느껴졌달까. 다음은 함께 고민하고 도출해 낸 국립여성사박물관의 전시주제이다. 과거로부터 험난한 여성의 길을 걸어왔으며, 오늘도 함께 걸어보며,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를 담자고 결론을 내리니 마치 곧 박물관이 개관이라도 할 것 같은 설렘이 공감대로 내려앉았다. 


< 국립여성사박물관의 전시주제 >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실기를 평가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사람씩 음악선생님의 방에 들어가 오 솔레미오를 부르고 나오는 미션이었다. 선생님은 좁은 방에 앉아 계시고 나는 문 열고 들어가 선 채로 바로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노래를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그 자리에 서보니 친구들도 의식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내가 연습했던 그대로 노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더욱 내 음정과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인은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그 한 명을 위해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나의 기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나 혼자서 다 쏟아낼 수 있는 시간, 단 한 명 앞에서 노래를 하고, 단 한 명만이 읽을 수 있는 시를 쓴다 생각하고 자문을 받아보시라. 다 말해보고 나서 돌아와 드는 생각, 그것이 진짜 당신의 기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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