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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새로워야 한다

< 기획자의 실무_7 >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상대방이 언급한 단어를 이해한다. 비슷한 교육환경에서 같은 과정, 같은 방식으로 배운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용어로 사람들과 소통하지는 않는다. 거기다가 우리나라는 개인 손바닥 안에서 같은 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에 속할 것이다. 어떤 용어를 나만 모르는 것 같은 그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너무 오래전에 사용하던 문구나 단어를 소환하면 혹시 꼰대취급을 받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 사회적 단어 사용에 자기 검열을 하고는 한다.    

  

  제안서 기획은 평가받는 시점에 가장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용어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연한 말 같지만, 미장원이 미용실이 되고 아무리 헤어숍이 되어도 여전히 현장에선 너무나 자연스레 회베, 가베, 데나오시, 메지, 우라 같은 일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너무 대중적이어서는 안 된다. 전시는 일반인이 관람하지만 제안서는 전문가가 작성하고, 평가자가 심사하기 때문이다.      


  관공서에서 작성하는 공문서는 지금도 변함없는 양식과 특유의 어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기업에서 창의적인 내용을 제안하는 기획서는 대략 십 년 단위로 문어체의 텍스트들이 변화해 온 것 같다. 90년대까지는 한자를 섞어서 쓰다가 2천 년대부터는 영어 단어를 자유로이 병행시키고, 2010년 이후로는 만들어낸 조어, 합성어를 무난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전 국민이 디지털 용어에 익숙해졌고, 면대면 대화나 책자 속 글이 아닌 온라인 토크에서 사용되는 텍스트들도 주류문장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이모티콘이나 해시태그가 대표적인 예 일 것이다.      


  또 하나 코로나 이전에도 간간히 시행되던 온라인 제출방법이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비대면 발표와 함께 더욱 자리를 잡게 되었다. 따라서 제안서 텍스트도 ‘출력용’만이 아닌 ‘화면용’을 더 고려하게 되었다. 화면에서는 작은 글씨보다 보여주고자 하는 비주얼을 더 강조하게 된다. 텍스트의 뜻도 중요하지만 어떤 그림으로 전달되는지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신조어에 해당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마케팅 용어들은 설명하지 않으면 바로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아졌다. 다행히 고객에 해당하는 우리 관람객들은 사전지식의 수준이 높다. 하지만 관람객은 결과만 볼 수 있지 우리의 과정을 공유하지 못한다. 늘 강조하지만 제안서를 평가하는 것은 심사위원이고 그들을 설득해야 그 내용이 관람객으로 전달된다. 그들에게 비슷한 단어들의 파생으로 어디서 들은 것 같고 본 것 같은 느낌만 준다면 설득에 실패한 것이다.      


  기획자에게는 어느 정도 새로운 것이 정말 새로운 것인지에 대한 현실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움이 아니라, 어디서 들은 것도 같고 본 것도 같은데 그보다는 조금 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새로움, 듣는 이로 하여금 소외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딱 한 발자국만큼의 새로움이어야 한다. 너무 앞서가면 외면받는다. 


< 판교 제2테크노밸리 창업생태계 홍보 및 소통교류 멀티플랫폼 제안_콘셉트설정 >


  <파노티카: PANOTICA>는 판교 제2테크노밸리 창업생태계 홍보 및 소통교류 멀티플랫폼의 콘셉트였다. PANOTICA는 Panopticon for All의 약자인데, 먼저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였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감옥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PANOTICA는 모두를 위해 높은 곳에서 넓게 둘러본다는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판옵티콘은 기존 단어이지만 PANOTICA는 내가 고안한 콘셉트라는 점이다. PANOTICA를 만들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어감은 ‘PAX AMERICANA: 팍스 아메리카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컬어 팍스 아메리카나라고들 한다.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라고 하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부정적인 뜻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니 팍스는 로마 신화에서는 평화의 여신이고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단어라고 했다. 완전히 새롭진 않지만 그래도 뜻은 궁금해지는 파노티카로 콘셉트를 정하고 공통어로 확장할 수 있는 PAN(모두)을 가지고 PAN COMMA,  PAN EXMA, PAN HUMA의 세 공간을 나누었다. 각각 교류, 전시, 소통 중심 공간을 연출하고 기업, 기관, 시민 모두를 다 수렴하고 조망할 수 있는 창업지원 플랫폼을 제안하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새로워야 한다. 


  그런데 너무 새로우면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므로 항상 조금만 더해서 새로워야 한다는 점이 늘 어렵다. 


  예전엔 공무원들이 최초를 싫어해 국외 해당사례가 있는 것만 불안해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우린 충분히 새로워도 되지만 기획자는 고객과 발주처와 심사위원을 리드할 때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보다 너무 멀리서 그들을 손짓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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