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려 받지 못한 것 >
조문을 마친 뒤에도 나는 어쩐 일인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그들의 불행 중 한 자락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장례식장에 들어설 땐 마치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처럼 서영 언니와 형부가 가장 먼저 나를 맞았지만, 막상 식사를 하려 하니 최만수 형부는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나와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검은 양복은 빌린 것인지, 혹은 살이 빠진 탓인지, 바지 자락 사이로 드러난 발목이 유난히 가늘었다. 한쪽 검정 양말은 내려와 있었고, 양말의 높이가 서로 달랐다. 형부 앞에는 서영 언니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중년 여인의 상복을 입은 등은 적당히 구부정했고, 탁자 위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은 뒤에서 보기에 마치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 같았다. 언니는 그날 남편의 손이 한 일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물어보기는 했을까?
최근에 둘이 운영하던 식당을 정리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망했다는 말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정작 누가 전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그 백만 원으로 형부는 뭘 했을까. 어디에, 어떻게 썼을까.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 행동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당시엔 오만 원권이 없었으니, 봉투는 제법 두툼했을 것이다. 가슴 안쪽 주머니에 접어 넣기에도 무겁고, 결혼식 내내 그것을 품고 있기엔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나는 영정 사진 속 작은어머니에서 멈추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불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어머니는, 제사상 앞에서 뭘 집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내 옆에 앉아 말없이 생선 가시를 발라 숟가락 위에 얹어주던 분이었다. 나는 커다란 생선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발라야 하는지 몰랐다. 엄마는 늘 제사상을 차리느라 바빴고, 다른 숙모들은 각자 자기 자식들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유독 작은어머니만은 입이 짧던 내게 여러 반찬을 꼼꼼히 챙겨주셨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머릿속에 스쳐 가는 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작은어머니의 한 장면은, 밥보다도 더 하얗던 생선 살 한 점이다. 그 손길 때문에, 나는 오고 싶지 않았던 이 장례식장으로 결국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생선 살 한 점이 백만 원을 이겼다.
작은어머니에게 서영 언니는 네 명의 자식들 중 가장 자랑하고 싶은 딸이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했던 언니. 주변에선 언니가 더 좋은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었다 했고, 특히 외갓집 어른들은 언니가 아까운 조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역시 처음부터 덩치만 큰 최만수 형부를 달갑게 보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보다 다소 빠지는 사위를 향한 주변의 평가가 작은어머니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위가 큰집 결혼식장에서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단순히 사위를 감싸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을 테다. 딸의 선택이 실패였음을 받아들이는 일이자, 자기 집안의 체면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친척들 앞에서 그 일을 입 밖에 냈을 때, 작은어머니가 벌컥 화를 내고 격렬하게 반응을 보였던 건 사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날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말을 꺼낸 것이 과연 옳았을까. 엄마는 그날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덮고 지나갔어야 했다고, 몇 번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분노와 아쉬움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잔칫날에 불미스러운 사건을 만든 사람에 대한 원망이 더 컸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내 친오빠였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 그리고 당시 투병 중이던 아버지에게 그 봉투는 삶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였다는 결론. 그래서 모처럼의 기회를 눈앞에서 빼앗긴 사람의 억울함이 컸을 것이라는 공감. 더구나 그 봉투를 건넨 사람이 가족 중 가장 부자이자, 누구보다 인색하기로 소문난 고모였기에, 그 돈은 단순한 ‘백만 원’이 아니었다. 봉투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아버지가 가족에게서 돌려받지 못했던, 어쩌면 마땅히 받아야 했던 몫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그 돈이, 자신이 가족들에게 지불한 시간과 희생의 대가, 부탁이 아니라 정당한 보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나는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고, 누군가의 부축 없이 하나뿐인 딸과 함께 자신의 두 발로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혼은 나를 위한 의식이기보다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을힘을 다해 걸어가서 웃었는데 말이야, 그 자식도 씨익 웃더라고.”
아버지는 그 일이 있고 정확히 3년 후 세상을 떠나셨다. 고작 대여섯 번의 명절이었지만, 그것조차 끝내 버티지 못하셨다. 그 일 때문에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가 변하셨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건 전화였다. 누가 전화를 걸어도 ‘받아라’ 하실 뿐, 본인이 직접 받는 일은 없었다. 전화를 받고 물리실 때에도 ‘치아라’ 하셨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하던 시간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아버지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결국 모든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 시작하셨다.
“내가 출세를 못해서 그란 기다.”
“몸이 이래가꼬, 돈도 없고… 내가 그란 기라.”
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조용한 결론을 내리셨다. 백만 원이 무엇이라고, 자신의 인생 전부를 자책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날의 백만 원은 끝내 돌려받지 못한 가족 내 위상, 그리고 권위 그 자체였다. 나 역시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같은 금액을 봉투에 담아 간 사람이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서영 언니의 친구들인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작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누군가 ‘백만 원’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만은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서영이 딸, 아직도 병원 다닌다더라. 이제는 영 고치긴 힘든가 봐.”
“그 애가 벌써 스물여덟이지. IMF 터졌던 해에 태어났으니, 97년생이잖아.”
“처음엔 몰랐대. 돌이 지나도 걷지도 못하고… 근육이 문제라더라. 지금도 여전히 걷질 못한단다.”
“한 번 치료받는 데 백만 원이 넘는다던데. 그 돈이 어디 매번 쉽게 나오니. 서영이가 저렇게 살 아이가 아닌데…”
돈이 어디 쉽게 나오냐는 그 말에 나는 어깨가 살짝 굳었다. 바란 대로 불행의 서사를 확인한 것 같은데 숨이 내쉬어지지 않았다. 내가 결혼한 해는 1998년이었다. 무남독녀였던 나는 아버지 쪽 사촌 형부와 엄마 쪽 외사촌 오빠가 축의금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 무렵 서영 언니의 딸은 돌을 지난 시점이었고,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지만 나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백만 원이 부디 그 아이의 치료비로 사용되었기를 바랐다. 최만수 씨가 그것을 다른 데에 쓰지 않고, 제발 딸아이의 병원비로 써주었기를.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아버지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밤을 새워 일했고, 쉬는 날엔 아르바이트도 했다. 모두가 가족이 주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의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깝다 해도, 도둑질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백만 원으로 딸아이의 병을 고치지도 못했을 텐데, 왜 늙은 아버지의 병원비를 훔쳐간 것인가. 우리 집안을 얼마나 무시하였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번 그렇게 되면 계속 안 풀리는 것 같아. 식당도 접고 이제는 치료를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서영이가 포기를 안 하나 봐.”
서영 언니와 최만수 형부는, 그 백만 원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혹시 ‘전체 축의금 중 일부’라며 스스로를 변명했을까. 그들의 대화는 그 말에서 뚝 끊겼고, 나도 천천히 일어섰다. 타인의 불행을 이야기할 때, 결론은 늘 간단하고 쉬웠다. 불행은 연장되어야 하고, 끝나지 않는 드라마처럼 다음 회차에도 같이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이로써 그 불행의 조각을 더 이상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상주용 리본이 달린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 손으로 잡았다.
“… 고생 많았어요.”
엉뚱하게도 나는 그 한마디만을 던지고 손을 놓았다. 아이 때문에 삶이 무너졌을 테니 그 말은 진심이었다. 형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스치듯 잠시 마주쳤다. 흠칫 놀란 건 나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로 그 순간, 형부가 뭐라도 한마디를 했다면 나도 답을 했을 텐데 서로 침묵을 택한 것이다. 불행의 서사는 확인됐고, 남은 건 범죄자의 마지막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응시하며 살짝 웃어주고 싶었다. ‘그동안 잘 사셨죠?’, 제발 내 눈과 마주쳐주기를. 하지만 그는 끝내 내 눈을 피했다. 백만 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와 같은 마음으로 돈을 지불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식장을 빠져나오던 순간, 검은 차량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백발의 단발머리를 한 고모가 천천히 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모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같은 단발의 서영 언니였고, 그 뒤에서 고모의 검은 가방을 조심스럽게 들어주는 건 형부였다. 흡사 딸과 사위처럼 보였달까. 물론 고모는 자신을 지켜보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욱신거렸다.
형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우리 가족을 향해 해명 비슷한 말조차 꺼낸 적이 없었다. 언니 역시, 혼자서라도 엄마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돈이 있었더라면, 출세를 했더라면 조카와 조카사위에게서 까지 부축을 받으셨을 텐데 말이다. 돈이 모자란 사람들은 꼭 돈 없는 사람의 돈을 빼앗고, 돈 있는 사람에겐 허리를 굽힌다. 그런데 저들 세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고, 서로의 동선까지도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어디서부터 인지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내가 틀리고 저들이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3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