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 아무도 없는 집에 간다》ㅡ16
플래시백 (Flashback)ㅡ
때는 2014년 가을.
일산의 어느 주상복합 15층 건물 2층 bar,
당시 나는 낮엔 촬영, 밤엔 가게운영으로 바쁜 날이 잦았다
여자 바텐더가 둘 있었지만,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한 명 더 뽑기로 했다.
면접은 저녁 8시. 그러나 그 전날 밤까지 이어진 촬영 탓에 나는 지쳐 있었고,
면접 시간에 10분쯤 늦었다. 씻지도
못하고 구겨진 옷차림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 가게에
도착했다.
여자 매니저가 “사장님, 면접 오신 분 저쪽에
있어요”라고 말하며 안내해 줬다.
나는 대충 질문 몇 개 하고 얼른 올라가서 자야지
"마음먹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헉. 말을 잃었다.
그녀는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정말 “헉” 소리 나게 예뻤다.
카메라 앞에 선 많은 여배우들을 봐왔지만,
그녀는 그들과는 다른 결을 지녔다.
화려하지도, 꾸미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시선이 머물렀다.
배우들은 보통 한 번 ‘어?’ 하고 스쳐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리게 되는데,
이 여자애는 달랐다. 딱 보고, 그다음 순간부터는 계속
눈이 따라갔다. 말 그대로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자연스러움이,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여기 사장님이세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 네.”
“낮에 다른 일 하세요?
“아… 아니요.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내 말은 버벅거렸고 얼굴은 약간 붉어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저녁 오픈 시간.
손님이 한 두 팀 들어오고, 직원 둘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저… 지금부터 일하면 되죠?” 찡긋"
“네? 아, 네… 그러면… 그래주면 고맙죠…”
나는 상황을 정리할 새도 없이 휩쓸려 들어갔다.
나는 무기력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그녀의 눈을 피했다.
피곤이 몰려왔고, 나는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요”라며
15층 집으로 올라갔다.
씻고 내려가야지 생각했지만, 정신없이 잠들어버렸다.
새벽 1시쯤ㅡ
여자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님, 손님도 빠졌고.. 새로운 알바도 들어왔는데..
회식 한번 해요?”나는 약간 머뭇거리다 “지금 내려갈게요”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린 여직원들의 소리. “야호~ 회식이다!”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정발산 쪽으로 택시를 탔다. 직원들이 “밤엔 무거운 거 말고
깔끔한 거 먹고 싶다”해서.. 횟집으로 도착.
그렇게 우리는 가볍게, 술은 적당히, 서로 소개를 주고받으며 둘러앉아 소소한
이야기로 웃음을 터뜨리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과
해맑은 얼굴들, 술잔이 오갈수록 서로 더 부드러워졌다.
회식이라기보다, 그냥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밤이었다.
그녀는 조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조차 영화처럼 느껴졌다
새벽 3시쯤ㅡ독립된 횟집 문이 쓱~열린다.
헐렁한 반바지에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선다. 둘 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묘하게 불량한 기운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그들은 테이블을 훑어보더니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나와.”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누구시죠? 무슨 일.."
그녀는 작게, 아주 작게 내 쪽으로 몸을 틀더니 말했다.
“사장님 저기.. 그게.. 헤어진… 전 애인.."
나는 잠시 당황, 한 템포 늦게 물었다.
“약속하고 온 겁니까?"
그러더니 남자 하나가 나를 노려보며 “빠지라고,
이 씨.”하며 툭' 밀쳤다.
술기운에 나는 휘청였고, 뒤로 넘어졌다.
등 뒤로 낮게 깔린 마룻바닥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순간 그녀가 소리쳤다.
“오빠 미쳤어? 왜 이래! 사장님한테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자 그 남자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따라 나와! 당장! 이게 어디서 씨.. 남자랑 술이야?”
“나오라고!! 이 자식.. 너 예전부터
이 새끼랑 만나고 있었냐?'
'그래서 나랑 헤어지자는 거였어?
대답해!.. 안 해?”
다른 두 여직원은 구석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고,
내 심장은, 점점 빠르고 깊게 뛰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졌다. 손등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 찰나— 술병 하나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냥 앉아있어 새끼야!.. 참견 말고..!
날카로운 궤적이 귀 옆을 스쳤고, 그 잔은
내 뒤 벽에 부딪혀 퍽!"
산산조각 났다. 파편 몇 개가 내 오른쪽 뺨에.. 피가 흘렀다.
순간, 던진 놈의 얼굴에 스친 건 짧은 당황, 마치
자신도 이걸 어쩌려던 건지 헷갈린 듯. 명중을 피한 게
실수인지, 의도인지—그의 동공은 흔들렸고,
손은 멈칫했다.
귀 아래로, 목선을 따라, 티셔츠 위로 붉고 선명한 선들이
스며들었다.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며 오른쪽 눈이 살짝 감긴다.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 씨발.. 내일 촬영 X 됐네.."
매니저가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이미 112를 눌렀는지
아래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매니저가 상황 설명을 했다.
나는 말없이 피를 닦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 새로운 알바, 그녀가 내 쪽으로 뛰어와
“사장님.. 병원 가요! 지금 가요! 지금.. 당장.. 빨리요!”
하며 나를 부축했다.
횟집 문을 열고 나가니 쌀쌀한 가을바람이 확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 뜨거운 얼굴, 아린 눈가. 누가 불렀는지 택시가 왔다. 그녀는
내 어깨를 안고 택시 문을 열었다.
백병원으로 향하는 길,
정발산 사거리의 가로수가 스쳐 지나가며 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간호사가 지혈부터 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가만히, 조용히, 아주 깊게.
그렇게 나는 열두 바늘을 꿰맸다.
그녀는 옆에 앉아 단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깊은 새벽.
병원의 흰 불빛 아래, 나는 여전히 셔츠에 묻은 피를 다 닦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얼굴이 얼얼했고, 세상의 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녀는 병원 복도를 따라 조용히 걸어오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사장님...
우리.. 같이 노래방가요..
나 가고 싶어 지금..”
나는 어이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노래방? 지금? 이 꼴로?”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뭐 어때요? 싫어요?”…?
아니, 참…”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은 왠지 차가웠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병원을 나와 골목을 지나, 우리는 정발산 사거리의 네온을 따라 걸었다.
공기는 싸늘했고, 지나가는 택시 불빛이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노래방 간판이 보였고, 그녀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룸.
검푸른 조명이 흐리게 깜빡이고 있었고, 모니터 화면 속 가수의 얼굴이
무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은 듯했지만, 곧 직원이
들어와 캔맥주 두 개와 과자 바구니를 놓고 갔다. 그녀가 준비한 듯했다.
나는 마시지 않고, 그녀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앉아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대학 졸업 때부터, 첫사랑, 꿈,
그리고.. 왜 이 일을 시작하려고 했는지..
어색한 웃음이 몇 번 오갔고, 때론
그냥..
아무 말없이 음악을 틀어두었다.
시간은 가고 있었다. 화면 모서리에 뜬 남은 시간 05:05
그녀가 불쑥 리모컨을 들어 몇 곡을 넘기다가 멈췄다.
“이 노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
반주가 흘렀다.
처음 듣는 곡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던 것처럼 낯익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따라 불렀다.
속삭이듯.. 혼잣말처럼..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 듯했다.
"아. 무.. 말... 안 해도..~~~~~"
떨리는듯한 그의 슬픈 멜로디가 공간을 서서히 채웠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촉촉했다.
가끔,
아주 가끔 나에게..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일.. 가게에서 뵐게요. 오늘 정말 미안해요..”
그날..
우리는 그대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녀는 그날 밤 이후..
.
.
.
사라졌다.
아직도, 그 노래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잊고 있었던 그 새벽,
그 슬픈 눈,
떨리는 입술,
그 피,
그 손목의 차가운 온기..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춘다.
2014년 가을 어느 날,
짧지만 강렬했던 그녀의 이름ㅡgsj.
그 노래가 들려오면.. 아니, 그 가수 얼굴만 스쳐도...
그녀가 떠오른다.
https://youtu.be/OEEai43R058?si=3qmVlN29MgI6O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