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 가라앉는 딸, 물 위로 피어오르는 꽃
인당수의 물빛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심청을 낳고 곧 죽었다. 심봉사는 눈먼 채로 갓난아이를 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다.
심청은 그렇게 컸다. 아버지의 눈이 되었다. 아버지의 손이 되었다. 밥을 짓고, 길을 안내하고, 세상과 아버지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아이가 부모를 돌보는 구조 — 설화는 이것을 효(孝)라고 부르지만, 지금의 언어로 말하면 역할의 역전이다.
어느 날 심봉사가 개울에 빠졌을 때, 스님이 말했다 —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올리면 눈을 뜰 수 있다고. 심봉사는 무심코 약속했다. 삼백 석을 구할 길이 없었다.
심청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남경 가는 뱃사람들이 인당수에 바칠 처녀를 삼백 석에 사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심청은 자기 몸을 팔았다.
배가 인당수에 이르렀을 때, 심청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열다섯 살이었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심청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화는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눈을 대신한 아이
이 설화를 효의 서사로만 읽는 것은 심청의 고통을 지우는 일이다.
융 심리학에서 심청의 구조는 **부성 콤플렉스(father complex)**의 전형에 해당한다. 심봉사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장애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상징이다. 아버지가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 그 결핍을 심청이 자기 존재로 메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어떤 가정에서 한쪽 부모가 기능하지 못할 때 — 아프거나, 무너져 있거나, 부재할 때 — 아이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가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의 감정을 관리하고,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된다. 이 아이는 밖에서 보면 의젓하고 착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역할이 주어졌고, 그 역할이 정체성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청이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자기 소멸이다. 아버지를 위해 사는 '나'에게는,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 논리적 완성이 되어버린다.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감각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는 것에 저항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1편에서 세운 원칙을 여기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치유된다는 말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짐을 지우듯이, 희생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멸을 미화하는 것이다. 심청의 희생은 감동적이지만, 그 감동의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설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청은 죽지 않는다. 물속에서 연꽃 속에 담겨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왕비가 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고, 심봉사는 눈을 뜬다.
1편의 바리데기와 비교하면 흥미로운 대칭이 보인다. 바리데기는 저승에 내려가 생명수를 가져왔고, 심청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연꽃으로 피어올랐다. 둘 다 아버지를 살린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돌아왔을 때 둘 다 아버지를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되어 돌아왔다. 바리데기는 무신이 되었고, 심청은 왕비가 되었다. 역할이 아닌 존재로.
결정적으로 — 심청이 돌아온 뒤에 심봉사의 눈이 뜨인다. 딸이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버지도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해 산다는 것
효의 문화 안에서 자란 우리에게, 심청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 감동에 한 번쯤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부모를 위해, 가족을 위해, 조직을 위해, 관계를 위해 — 자기를 내려놓는 것을 미덕으로 배운 사람들. 그 사람들의 무의식 안에 심청이 산다. 인당수에 뛰어드는 것이 유일한 선택인 것처럼 느끼는 심청이.
이 시리즈는 바리데기로 시작해 심청으로 끝난다. 버려진 딸과 희생하는 딸. 둘 다 아버지를 살린다. 둘 다 죽음에 가까운 곳을 통과한다. 그리고 둘 다 — 아버지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이것이 설화가 수백 년에 걸쳐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치유는 타인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기를 통과한 뒤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완성된다.
인당수의 물은 차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연꽃은 피어올랐다.
부모의 기대를 위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진로를 택한 사람이 있다. "부모님이 원하시니까." 그 선택 안에서 느끼는 이상한 충만감 — "나는 효도하고 있다"는 확인. 동시에 느끼는 공허 — "이건 내 삶인가." 두 감정이 동시에 있는 것이 심청의 자리다.
"누군가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을 하나 떠올려보라. 그것을 안 해도 그 관계가 유지될까. 유지된다면 —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거나 두려움일 수 있다. "안 하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심청이 인당수 앞에서 던지지 못한 질문을 대신 던지는 것이다. 물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 이것은 정말 나의 선택인가.
당신이 빠져 있는 물속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 당신은 언제 피어오를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