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이후의 시간
남겨진 사람의 계절
선녀는 떠났다. 2편에서 우리는 나무꾼의 욕망과 투사를 분석했다. 그러나 설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녀가 떠난 뒤에도 나무꾼의 시간은 계속된다.
나무꾼은 사슴의 도움으로 하늘에 올라간다. 선녀와 아이들을 다시 만난다. 잠시 행복하다. 그러나 금기가 있다 — 지상의 어머니가 보고 싶거든, 천마를 타되 절대 땅에 내려서는 안 된다.
나무꾼은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천마를 타고 내려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가 끓여준 호박죽이 뜨거워 말 등에 쏟았고, 놀란 천마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나무꾼은 땅에 남겨졌다. 선녀도 잃고, 하늘도 잃고, 되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나무꾼은 수탉이 되었다고 한다. 새벽마다 하늘을 보고 우는 수탉이.
두 번째 상실의 의미
나무꾼은 두 번 잃는다. 첫 번째는 투사의 대상을 잃은 것이다. 두 번째 상실은 다르다. 하늘에서 다시 만난 뒤 다시 잃는 것. 이번에는 나무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다.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마음, 호박죽의 뜨거움에 놀라는 순간적 반응 — 이 아주 인간적인 감정과 신체 반응이 결정적 순간에 개입한다. 나무꾼은 하늘의 세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익숙한 것에 끌려 내려온다.
융은 개성화가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 번 이루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나선형의 과정이다. 나무꾼의 두 번째 실패는 이 나선의 한 국면이다.
첫 번째 상실 뒤 나무꾼은 하늘에 올라갔다. 이것은 성장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지상의 어머니에게 끌려 내려온 것 — 7편에서 다룬 모성 원형이 여기서 다시 작동한다. 자기(Self)를 향해 나아가다가, 익숙하고 따뜻한 과거로 퇴행한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극히 인간적인 비극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도 퇴행한다. 새로운 자리에 서면서도 옛 자리가 그립다. 나무꾼의 실패는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반영이다.
설화는 나무꾼에게 수탉의 삶을 준다. 새벽마다 하늘을 보고 우는 존재. 융은 상실 이후의 **애도(mourning)**를 병리가 아니라 필수적 심리 과정으로 보았다.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슬퍼해야, 비로소 내면의 에너지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울어도 된다는 허락
상실 앞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라. 시간이 약이다.
이 말들은 선의에서 나오지만, 때로는 폭력이 된다. 충분히 슬퍼하기도 전에 슬픔을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 1편에서 세운 원칙을 여기서 다시 확인한다 — 치유는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울어도 된다.
나무꾼이 수탉이 되어 매일 아침 우는 것을, 나는 설화가 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설화는 나무꾼에게 "그만 울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울 수 있는 형태를 준다. 슬픔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설화가 할 수 있는 치유다.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슬퍼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너무 빨리 괜찮은 척한 적은 없는가.
이별 후 일부러 슬픈 노래를 찾아 듣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프면서도 그 아픔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것. 잊으면 편해질 텐데, 편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 잊으면 정말 끝이니까.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때 드는 감정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 것. 슬프면 슬픈 채로 두는 것. 다만 "지금 나는 슬퍼하고 있다"는 인식은 유지하는 것. 슬픔 속에 잠기는 것과, 슬픔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아는 것은 다르다. 나무꾼의 울음은 전자다. 울면서도 "나는 울고 있다"를 아는 것이 후자다. 그 한 뼘의 거리가, 슬픔에 삼켜지는 것과 슬픔을 살아가는 것의 차이를 만든다.
당신의 새벽은, 아직 울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