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만세 소녀"로 안다. 실은 담을 넘은 여성이었다.
다들 "만세 부른 소녀"로 안다.
교과서에 실린 얼굴. 태극기를 든 어린 소녀. 순결하고 용감한 애국 소녀. 5만 원권 인물 후보에 올랐으나 "고문받기 전 사진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유관순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것은 이 정도다.
그런데 유관순은 소녀가 아니었다. 시위를 기획하고, 3,000명 앞에서 연설하고, 법정에서 일본 판사에게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한 정치적 주체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아무도 유관순을 몰랐다. 해방 후에야 "만들어진 영웅"이 됐다. 만든 사람은 친일파였다.
이화학당의 학생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매봉산 아래 지령리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집안이었다.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한 동네. 1916년,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했다. 열네 살.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세계를 배웠다. 영어, 역사, 지리.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이문회라는 모임에서 시국 강연을 듣고 토론했다. 을사조약 이후 이화학당에서는 오후 3시만 되면 수업을 멈추고 독립 기도회를 열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아는 것"이 달라졌다. 아는 것이 달라지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보는 것이 달라지면 원하는 것이 달라진다.
한 번은 친구와 한밤중에 태극기를 70장 그려서 선교사의 방, 기숙사, 교실마다 붙였다. 다음 날 소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유관순이었다.
담을 넘다
1919년 1월, 고종이 서거했다. 독살설이 퍼졌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시위 행렬이 이화학당 교문 앞에 이르러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학생들이 교문으로 달려갔다. 프라이 교장이 막았다. 다칠까 걱정해서.
대부분의 학생은 포기했다.
유관순은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뒷담을 넘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학생 시위에도 참여했다. 체포됐다. 이화학당이 교섭하여 풀려났다. 총독부는 3월 10일 자로 전국에 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기차를 타고 천안으로 내려갔다. 기차 안에서 친구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으로 들린다고 했다. 유관순은 "조선독립! 조선독립!"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
아우내 장터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서울의 소식을 전했다.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어른들에게 보여줬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이웃 조인원 등과 거사를 계획했다. 음력 3월 1일, 양력 4월 1일. 아우내 장날.
유관순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태극기를 직접 만들었다. 거사 전날 밤, 뒷산 매봉산에 횃불을 올렸다. 주변 20여 곳의 산봉우리에서 응답하는 불이 타올랐다.
4월 1일 아침. 아우내 장터에 3,000명이 모였다.
유관순은 광주리에 숨겨온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쌀 섬 위에 올라가 연설했다. 열일곱 살. 3,000명 앞에서.
"나라 없는 백성이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다 같이 독립 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했다. 맨 앞에 유관순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일본 헌병이 출동했다. 무차별 사격. 19명 사망. 30명 부상.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날 현장에서 죽었다.
유관순은 쓰러진 부모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부모의 시신을 사람들과 함께 둘러업고 헌병 주재소로 달려갔다.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법정
유관순은 체포됐다. 공주교도소에 수감. 공주 영명학교에서 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된 오빠 유우석을 이곳에서 만났다.
일본 경찰은 처음에 어린애로 보고 배후를 추궁했다. 유관순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심 공주지방법원. 징역 5년. 법정에서 유관순이 말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2심 경성복심법원. 징역 3년. 다른 사람들은 상고했다.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멈추지 않았다.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 오후 2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다.
고문이 이어졌다. 여기서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해야 한다. 체포된 여성에 대한 취조 과정에서 성폭력이 광범위하게, 공공연히 일어났다. 이것은 유관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관행이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는 육체적 고문을 받았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육체적 고문 위에 성적 폭력이 더해졌다.
1920년 4월, 영친왕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줄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출소하지 못했다. 고문과 영양실조.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 18세.
형무소는 시신 인도를 거부했다. 고문의 흔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화학당 교장 월터가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전 세계에 호소하겠다"라고 항의했다. 조건이 붙었다 — 해외 언론에 알리지 말 것,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를 것.
월터는 시신에 수의를 입혔다. "나는 그녀의 온전한 몸에다 수의를 입혔다." 비단 수의를 입히고 태극기를 가슴 위에 덮었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일제가 공동묘지를 군용 기지로 개발하면서 유해는 이장 과정에서 유실됐다.
유관순의 무덤은 지금 없다.
아무도 몰랐다
여기까지가 유관순의 인생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1945년까지, 유관순은 조선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어떤 신문에서도 유관순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3·1 운동으로 7,500명이 죽었다.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될 이유가 당시에는 없었다.
1947년 말까지도 유관순은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이었다.
그러면 누가, 왜, 유관순을 "만세 소녀"로 만들었는가.
만들어진 영웅
1946년.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요청했다.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 박인덕은 유관순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유관순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박인덕. 이화학당 교사 출신. 유관순의 스승. 3·1 운동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됐다. 여기까지는 독립운동가의 이력이다.
그 뒤가 문제다. 박인덕은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으로 1941년 덕화여숙을 설립했다.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과 논설을 발표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다.
신봉조. 이화여고 교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참여. 역시 친일 반민족행위자.
해방 후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가 필요했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하면 자신들의 과거를 덮을 수 있었다. 유관순이 선택됐다.
박인덕과 전영택(최초의 유관순 전기 집필자)은 유관순을 "조선의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만들었다. 정부 수립을 앞둔 시기에 우파 정치인들이 유관순의 희생정신을 건국정신으로 기려야 한다며 띄웠다.
친일파로 훼절한 스승이 자신을 세상에 알린 사실을. 유관순이 저승에서 지켜봤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남과 북이 공유한 문법
1992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1 운동 파트에서 유관순이 등장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직접 언급한 인물은 반드시 교육 대상이 된다. 이후 북한 매체에서도 유관순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2015년부터는 역사교과서에도 실렸다.
남북한이 공히 인정한 독립운동가. 그런데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유관순은 "어린 소녀"였다. 시위를 기획하고 3,000명 앞에서 연설한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어린 소녀. 남과 북의 체제는 정반대인데, 여성을 "소녀"로 환원하는 문법은 같았다.
상처 — 박탈
유관순의 상처는 좌절이 아니다. 박탈이다.
이화학당에서 세계를 배웠다. 담을 넘었다. 시위를 기획했다. 3,000명 앞에서 연설했다. 법정에서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옥중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모든 것을 한 뒤에, 18세에 감옥에서 죽었다.
심리학에서 학습된 무력감이란 "해봤자 안 된다"는 체념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유관순에게 이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유관순은 체념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만세를 불렀다. 무력감이 아니라 박탈 —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는데도 빼앗긴 것이다.
성적 트라우마 — 정치적 몸이 성적 몸이 되다
남성 독립운동가의 투옥은 영웅의 훈장이 됐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투옥은 의심의 대상이 됐다. "무슨 일을 당했느냐." 같은 감옥, 같은 고문인데 남성에게는 명예가 되고 여성에게는 의혹이 되는 구조.
식민 권력은 여성의 정치적 저항을 성적 수치로 응징했다. 그리고 봉건적 가치관이 알아서 그 여성을 처벌해 준다. 부모가 딸의 사회 활동을 막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정치적 공포와 성적 공포가 겹쳐 있었다.
당시 가치관
여성의 순결이 존재의 조건이던 시대였다. 이것은 야만이 아니라 500년간 이어진 구조의 산물이다. 식민 권력은 이 구조를 정확히 이용했다. 여학생을 성적으로 모욕하면, 봉건적 가치관이 알아서 그 여성을 처벌해 준다. "현모양처"라는 출구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세계를 보여주고 부엌으로 돌려보내는 구조.
극복, 그리고 견인
유관순은 18세에 죽었다. 그러나 유관순이 넘은 담은 다시 세울 수 없었다.
여학생이 거리에 나오기 전, 3·1 운동은 남성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 중심이었다. 유관순이 아우내에서 보여준 것은 서울 밖에서도, 여성도, 열일곱 살 학생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엘리트의 운동"에서 "민중의 운동"으로. 여성의 참여가 독립운동의 저변을 근본적으로 넓혔다.
근우회(1927)는 이 경험의 연장선에 있다. 좌우를 넘어 여성이 여성으로서 조직한 최초의 전국 단체. 시민운동의 기본 문법 — 전국 조직, 의제 설정, 좌우 통합 — 을 여성 단체가 먼저 만들었다. 남성 지식인은 근대를 논했지만, 여성은 근대적 조직을 실제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남은 것
유관순의 인생에는 세 번의 회수가 있었다.
첫 번째. 살아서. 배우고, 싸우고, 대가를 치렀다. 감옥에서 죽었다. 18세.
두 번째. 죽은 뒤. 친일파가 "순결한 소녀"로 만들었다. 시위를 기획하고 연설하고 법정에서 항변한 정치적 주체가, 교과서 안의 "만세 소녀"로 축소됐다.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간 여성이, 다시 담 안에 갇혔다.
세 번째. 남과 북. 체제가 정반대인 두 나라가 유관순을 공히 인정했지만, 공히 "어린 소녀"로 환원했다. 정치적 주체성은 삭제되고 도덕적 순결함만 남았다.
이름을 되돌려줘야 한다. 만세 소녀가 아니라, 담을 넘은 여성.
그리고 유관순 같은 사람이 유관순 하나만은 아니었다.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 수없이 많다. 유관순이 교과서에 실린 사이, 윤희순은, 남자현은, 김마리아는, 박차정은, 정정화는 묻혔다.
한 명의 "소녀"를 세우고 나머지를 지우는 것. 이것도 회수다.
다음 편에서는 기방에서 카페로 옮겨간 여성들의 하루를 본다. 공간이 바뀌었으나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