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천재"가 됐다. 금홍은 사라졌다
다들 "이상의 여자"로 안다. 대부분은 이름조차 모른다.
금홍. 기생 출신. 이상의 연인. 제비다방의 마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다방을 실제로 경영한 사람. 문학사에 남은 것은 이상이다. 금홍은 사라졌다.
카페의 여자들은 어디서 왔는가
카페 여급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의 딸.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 권번에서 나온 기생. 버림받은 여성. 여고보를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는 여성. 네 갈래 길이 전부 같은 자리로 수렴했다. 카페의 빈 의자.
공장 임금보다 팁이 나았다. 선택이 아니라 선택지의 부재였다.
금홍은 기생이었다. 1933년,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이상을 만났다. 이상이 금홍을 서울로 불러들여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열고 마담으로 앉혔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
기방에서 카페로의 이동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다. 여성이 근대 도시의 경제 주체로 진입한 사건이다.
기생은 권번이라는 제도 안에 있었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고, 권번이 관리하고, 요정에 파견됐다. 제도가 여성을 관리했다.
카페 여급은 시장 안에 있었다. 고용주와 계약하고, 팁으로 살았다. 제도가 아니라 시장이 여성을 움직였다. 이것은 봉건에서 자본으로의 전환이다.
금홍이 제비다방을 경영한 것은 이 전환의 상징이다. 이상의 동생이 제비다방에 갔을 때 — "큰오빠는 홀에서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금홍이는 주로 뒷방에서 자고 있곤 했어요." 이상은 문학을 논했고, 금홍은 다방을 경영했다. 이상은 제비다방 이후에도 카페 쓰루, 다방 69, 다방 무기를 열었지만 전부 망했다. 이상이 천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금홍이 경영한 것이다.
경성의 카페 대부분을 여성이 경영하고 운영했다. 이태준이 왔고, 정지용이 왔고, 박태원이 왔다. 남성 지식인이 카페에서 문학을 논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그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의 상품화
그러나 이 진출에는 대가가 있었다.
기생은 기예를 팔았다. 시를 읽고, 가곡을 부르고, 악기를 연주했다. 기술의 가치가 있었기에 이름이 남을 수 있었다. 황진이, 매창, 논개.
카페 여급은 분위기를 팔았다. 옆에 앉아 있는 것. 웃어주는 것. 술을 따라주는 것. 기술이 필요 없었다. 젊음과 외모가 전부였다. 기술이 이름을 만든다면, 분위기는 익명을 만든다.
기방에서는 성적 서비스가 제도 안에 있었다. 카페에서는 시장의 논리로 작동했다. 기생은 기예라는 방패가 있었다. 여급에게는 그것도 없었다.
이상은 금홍을 소설로 썼다. 「봉별기」. 금홍은 왜 이상을 때렸는가. 왜 떠났는가. 「봉별기」에는 이것이 없다. 이상의 내면만 있다. 금홍이 쓴 금홍은 없다. 여성의 삶이 남성의 소설 재료로 소비되는 것 — 이것도 상품화의 한 형태다.
그럼에도, 근대 여성상
남성 문학은 카페 여성을 세 가지로 그렸다. 박태원은 "풍경"으로. 이상은 "거울"로. 김유정은 "희극"으로. 어느 쪽이든 여성 자신의 목소리는 없다.
그런데 여급 자신이 쓴 글이 있다. 잡지 《여성(女聲)》에 실린 수기들. 보통학교 선생이었던 딸이 여급이 됐다는 이야기. 연애에 실패하고 아이를 가진 채 카페에 앉게 된 이야기. 자기 처지를 자기 언어로 쓴 것.
이름 없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가 저항이었다. 남성 문학에서 풍경이고 거울이고 희극이었던 여성이,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 것. 근대적 여성 주체의 출현이다.
도시의 미를 만든 사람들
카페 여급의 문화적 영향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20년대의 "신여성"은 나혜석, 윤심덕 같은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였다. 일반 여성이 따라 할 수 없었다. 1930년대의 "모던걸"은 달랐다. 교육과 무관하게 옷차림과 스타일로 정의되는 새로운 범주.
이 범주를 실제로 만든 것이 카페 여급이다.
여급은 직업상 양장을 입어야 했다. 화장을 하고, 서양식 머리를 하고, 구두를 신었다. 팁이 외모에 달려 있었으니 가장 적극적으로 근대적 미를 실천한 계층이었다.
백화점이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을 유리창 안에 전시했다면, 여급은 그 기준을 몸에 입고 거리를 걸었다. 경성의 일반 여성이 양장을 처음 본 것은 백화점 쇼윈도가 아니라 카페 앞을 지나가는 여급이었을 것이다.
근대적 미의 기준을 몸으로 퍼뜨린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하는 여성이었다. 여급은 근대 도시 문화를 경영했을 뿐 아니라, 근대적 미 자체를 창출하고 전파한 주체였다.
지금까지 남은 것
1935년 여름, 금홍은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 이것이 이상이 기록한 금홍의 마지막이다. 그 뒤 금홍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우인초상」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목이 긴 여인 초상」이 있다. 금홍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초상은 미술관에 걸려 있고, 금홍의 초상은 개인 소장이다.
카페 여급은 댄스홀 여성이 됐고, 다방 레지가 됐고, 룸살롱 여성이 됐다. 이름만 바뀌었다. 후일담이 없다는 것 자체가 후일담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인해야 한다. 카페 여급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 도시에 경제 주체로 진입했고, 도시 문화를 경영했고, 근대적 미를 창출했다. 성이 상품화되는 구조 안에서도 여성은 근대를 만들고 있었다.
기방에서 카페로. 달라진 것은 공간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여성이 문화를 만들고 남성이 기록하고 기록에서 여성이 사라지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