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여자는 위험하다

윤심덕-자유를 행사하면 벌을 받았다.

by 응시

다들 "정사(情死)의 여자"로 안다.

현해탄에서 유부남과 함께 몸을 던진 비운의 여가수. 「사의 찬미」. 대부분의 사람이 윤심덕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도다.

그런데 윤심덕은 "정사의 여자"가 아니었다. 나물장수의 딸이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가 됐고, 동생 셋의 학비를 대는 가장이었고, 꿈을 담을 무대가 없어서 유행가를 불러야 했고, 소문에 쫓겨 하얼빈까지 도망쳤고, 마지막 녹음에서 죽음의 노래를 자기 손으로 썼다.

나물장수의 딸

아버지는 나물을 팔았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일했다. 넉넉한 집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 남매가 전부 음악을 했다. 윤심덕은 교회에서 노래를 배웠다. 목소리가 좋았다. 경성여고보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도쿄음악학교. 이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 키가 크고 목이 길었다. 자신감이 넘쳤다고 전해진다. 남학생들과 내외하지 않았다. 활달했다.

1923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이때부터 서울의 모든 음악회에는 반드시 윤심덕이 들어갔다.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가 대중을 휘어잡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무대가 없었다

조선에는 오페라 극장이 없었다.

윤심덕은 대형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 이탈리아 유학을 가서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조선에서 성악 공연의 보수는 교통비 정도였다. 세계 수준의 훈련을 받고 돌아왔는데, 그 훈련을 펼칠 무대가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언니, 여동생, 남동생. 동생들의 유학 학비를 전부 윤심덕이 마련했다. 부모의 생활비도 윤심덕이 댔다. 여동생은 미국에서 피아노를, 남동생은 도쿄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전부 윤심덕의 돈이었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는 가장이었다.

꿈과 생계 사이에서 타협했다. 대중가요를 불렀다. 라디오에 나갔다. 경성방송국에서 1세대 라디오 DJ를 했다. 연극배우도 했다. 클래식을 공부한 소프라노가 유행가를 부르고 연극 무대에 서는 것 — 자존심의 굴절이었다.

소문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나물장수의 딸이 스타가 되면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

남동생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재력가 이용문을 찾아간 일이 기사화됐다. 기사 말미에 "이후는 알아서 생각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부호의 첩이 됐다"는 소문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근거 없는 이야기였다.

도쿄 유학생 박정식이 윤심덕에게 여러 차례 구애했다가 거절당해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소문이 만들어지고 유통됐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매력이 남성의 파멸의 원인이 된다는 서사 — 윤심덕이 무엇을 했는가는 사라지고, 남성에게 무엇을 했는가만 남는다.

홍난파가 동우회에 윤심덕을 데려오면서 "사귄다"는 소문이 났다. 김홍기와 결혼설이 돌다가 김홍기 집안에서 파혼하는 기사가 나왔다. 전부 윤심덕의 의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이었다.

연극 무대에 올랐을 때는 "예술가인 척하는 계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여배우는 기생 취급을 받았다. 클래식을 하면 "대중을 모른다"라고 했고, 대중가요를 부르면 "격이 떨어졌다"라고 했고, 연극을 하면 "천하다"라고 했다. 무엇을 해도 비난이 돌아왔다.

결국 윤심덕은 조선을 떠났다. 하얼빈의 목사 집에서 은거했다.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마지막 녹음

돌아온 뒤에도 동생의 유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1925년 말, 일본 오사카의 닛토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경성역에서 배웅 나온 작가 이서구가 "취입 잘하고 돌아올 때 고급 넥타이나 사오라"고 했다. 윤심덕이 웃으며 대답했다. "죽어도 사와요?" 이서구는 나중에 회상했다 —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1926년 여름, 오사카에서 녹음이 진행됐다. 24곡을 녹음했다. 전부 끝난 뒤, 윤심덕은 음반사 사장에게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직접 가사를 붙인 곡이었다. 「사의 찬미」.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죽음을 찬미하는 가사를 자기 손으로 쓴 여자. 원래 계약에 없던 곡을 마지막에 추가한 것이다. 이것이 윤심덕의 마지막 녹음이었다.

8월 1일, 녹음 완료. 8월 4일,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로. 승객 명부에 '윤수선'. 수선(水仙)은 윤심덕의 호였다. 같은 배에 '김수산'. 수산은 극작가 김우진의 호. 두 사람은 배에서 사라졌다.

목격자 없음. 유서 없음. 시신 미발견.

죽음 이후 — 진짜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윤심덕이 사라지자 조선의 신문들이 달려들었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情死)." 신문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라고 썼다. 유서가 있었다고도 보도했다. 전부 거짓이었다. 목격자도, 유서도, 시신도 없었다.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연인 관계를 일제히 부정했다. 작가 조명희는 "풍문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문은 멈추지 않았다. 윤심덕의 사생활, 외모, 남성 관계가 며칠간 기사가 됐다. 닛토레코드는 실종 이틀 후 「사의 찬미」의 발매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가수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음반은 10만 장이 팔렸다고 전해진다. 윤심덕이 살아 있었다면 이 음반이 그만큼 팔렸을까. 죽음이 판매량을 만들었다. 음반회사는 마케팅을 할 필요도 없었다 — 신문이 스캔들을 보도해 주면 음반은 자동으로 팔렸다. 이전까지 부유층의 재산 목록에 속하던 축음기가 이 사건을 계기로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죽음이 최초로 대중문화 상품이 된 순간이다.

윤심덕의 여동생은 미국에서 실종 소식을 들었다.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리다 인터뷰했다 — "살았든 죽었든 관심 갖지 마시오." 죽은 뒤에도 가족이 소비됐다.

소문은 계속 재생산됐다. 1931년에는 두 사람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기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우진의 형이 총독부를 통해 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했다. "그런 남녀는 없다"는 공식 답변이 왔다. 소문으로 고통받아 죽음을 생각한 여자의 죽음이, 다시 소문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상처 — 이중구속

윤심덕의 인생을 관통하는 구조가 있다. 심리학에서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 부른다. "자유로워져라, 그러나 자유롭게 행동하지 마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벌을 받는다.

근대는 윤심덕에게 유학을 보내고, 무대를 열어줬다. 그러나 그 무대를 쓰려하면 무대가 없었고, 돈을 벌려하면 "격이 떨어졌다"라고 했고, 사랑을 하면 "문란하다"라고 했고, 떠나려 하면 "도망친다"라고 했다.

성적 트라우마 — 존재의 성적 환원

김우진은 "비운의 극작가"로 기억됐다. 윤심덕은 "정사의 여자"로 기억됐다.

같은 배에서,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다. 남성에게는 예술적 수식이 붙었고, 여성에게는 성적 수식이 붙었다.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것, 독창회를 연 것, 동생 셋의 유학비를 댄 것, 24곡을 녹음한 것 — 이 모든 것이 "정사"라는 두 글자 아래 묻혔다.

당시 가치관

봉건이 "여자의 정조"를 문제 삼는 틀을 제공했고, 신문이 그 틀로 기사를 썼고, 음반 자본이 그 기사로 음반을 팔았다. 봉건·언론·자본 세 구조가 맞물려 윤심덕을 "정사의 여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대는 알고 있었다. 1920년대부터 조선에서는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신문에 여성의 교육·직업 문제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알면서 안 바꾼 것이다.

남성 문학이 설계한 여성

같은 시대, 이광수의 《무정》에서 영채는 순결을 잃고 괴로워한다. 김동인의 「감자」에서 복녀의 욕망은 "본능"이다. 이광수는 여성의 욕망을 삭제했고, 김동인은 야수 화했다. 문학사에 남은 것은 남성이 설계한 여성이다. 윤심덕은 자기 방식으로 살았지만, 기록에 남은 것은 남성이 만든 서사다.

극복, 그리고 견인

그래도 「사의 찬미」는 남아 있다.

나물장수의 딸이 도쿄에서 성악을 배워 돌아와, 먹고살기 위해 유행가를 불렀다. 그 유행가가 조선에 축음기 시대를 열었다. 음반 불모지였던 이 나라에 최초로 음반 시장이 형성된 것이 윤심덕의 죽음 이후였다.

윤심덕 이후,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불렀고, 왕수복이 무대에 섰고, 선우일선이 노래했다. 1930년대 조선 대중문화의 중심에 여성 가수가 섰다. 남성 지식인은 문학과 사상으로 근대를 논했지만, 대중에게 근대의 감각을 처음 전달한 것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여성이 근대 대중문화를 만들었다. 상처를 입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끌고 간 것이다.

지금까지 남은 것

"자유로운 여자는 위험한 여자다." 이 등식은 지금까지 작동한다.

나물장수의 딸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가 됐다. 동생 셋을 유학 보냈다. 이탈리아를 꿈꿨지만 유행가를 불러야 했다. 소문에 쫓겨 하얼빈으로 도망쳤다. 마지막 녹음에서 죽음의 노래를 자기 손으로 썼다. 배에서 사라졌다. "정사의 여자"가 됐다.

목소리는 남았다. 소비될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었다.

말한 여자의 최후는 6편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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