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 — 김승옥, 《무진기행》

"안갯속 여자에게 옮겨간 감정의 정체"

by 응시

1. 장면

윤희중은 서울에서 무진으로 간다. 제약회사 시장의 사위가 되어 출세가 확정된 시점에, 갑자기 고향으로 향한다. 무진에는 안개가 있다. 그리고 안갯속에서 하인숙을 만난다.


하인숙은 무진에 갇혀 있는 여자다. 음악 교사. 한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윤희중은 그녀에게 빠르게 끌린다.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감정이 오간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하인숙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이미 잊어버리고 있다.


이 망각의 속도가 핵심이다. 그토록 강렬했던 감정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가. 답은 하나다. 그 감정은 처음부터 하인숙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2. 명명

전치. 프로이트가 말한 이 기제는 감정의 이동이다. 본래 대상에게 향해야 할 감정이,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직장에서 받은 분노를 가족에게 푸는 것, 부모에 대한 원망을 연인에게 쏟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낯선 대상에게 투여하는 것.


전치가 투사와 다른 점은, 감정의 주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사는 "내 감정이 아니라 네 감정"으로 바꾸지만, 전치는 "네게 향할 감정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향할 감정"으로 바꾼다. 감정은 내 것으로 남아 있되, 방향만 이동한다.


전치가 일어나는 이유는 본래 대상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이 감정을 보내면 관계가 파괴되거나, 자기 자신이 견딜 수 없게 되거나, 현실이 무너진다. 그래서 마음은 안전한 대리 대상을 찾는다.


3. 독해

왜 전치였을까

윤희중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다. 장인이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데릴사위로,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다. 겉으로는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자기 자신을 팔아서 얻은 것이다. 젊은 날의 야망, 문학적 감수성, 무진에서 느꼈던 어떤 순수한 것. 이 모든 것을 교환해서 얻은 자리다.


이 자기 경멸 앞에서 앞선 방어기제들은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억압은 해당되지 않는다. 윤희중은 기억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투사도 해당되지 않는다. 아내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선택한 것을 안다. 투사는 "내 탓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합리화는 불완전하게 작동했다.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라고 스스로를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화가 완벽했다면 무진에 갈 이유가 없다. 무진행 자체가 합리화의 실패를 증명한다.


반동형성도 해당되지 않는다. 자기 경멸을 자기만족으로 뒤집어야 하는데,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삶에 만족한 적이 없다.


부정도 해당되지 않는다. 윤희중에게는 감정이 넘친다. 문제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이다.

감정은 어디로 옮겨 갔는가


전치가 선택된 이유는, 윤희중의 감정이 향할 진짜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경멸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면 서울에서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나는 나를 팔았다"는 문장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대리 대상을 찾는다. 감정을 옮겨놓을 수 있는 안전한 대상.


하인숙이 그 대상이 된다. 무진에 갇혀 있고, 한때 죽으려 했고, 어딘가 부서져 있다. 윤희중은 그녀에게서 자기 안의 부서진 부분을 본다. 하인숙을 안쓰러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것이고, 하인숙에게 끌리는 것은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끌리는 것이다.


광주역 앞의 미친 여자

무진에 도착하기 전, 윤희중은 광주역 앞에서 한 미친 여자를 본다. 대낮이다. 사람들이 오가는 한가운데서 혼자 미쳐 있다.


이 여자가 무진의 첫 거울이다. 세속을 완전히 벗어난 자의 모습. 윤희중이 무진에서 만날 여자들 — 자살한 술집 여자, 한때 죽으려 했던 하인숙 — 이 이 여자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리고 이 여자는 윤희중이 가지 않은 길이다. 세속을 벗어나려면 미쳐야 한다. 윤희중은 미치지 못한다. 나중에 편지를 찢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기 구원의 끝이 광주역 앞의 미친 여자라면, 거기까지 갈 용기가 없다.


세 사람, 세 개의 거울

무진에는 세 사람이 있다. 조, 박, 하인숙. 세 사람 모두 윤희중의 거울이다.


조는 세무서장이다. 무진에 남아 출세했다. 하인숙과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집안이 허술해서"다. 아내를 고른 윤희중의 논리와 똑같다. 조는 윤희중이 된 모습이다.


박은 후배 교사다. 하인숙에게 순수한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조가 그 편지를 비웃지만 박은 모른다. 박은 윤희중이 버린 모습이다. 젊은 날의 야망, 세속과 타협하지 않은 자리.


하인숙은 다르다. 조와 박이 자기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하인숙은 움직이려 한다. 무진을 떠나고 싶어 한다.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매달린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욕망을 가진 존재다.


윤희중이 하인숙에게 가장 끌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조는 자기가 된 모습이고, 박은 자기가 버린 모습이지만, 하인숙은 자기가 떠나고 싶은 욕망 그 자체다. 움직이는 거울.


그래서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은 연애의 약속이 아니다. 자기 구원의 약속이다. 갇힌 자기를 꺼내는 일. 잃어버린 욕망을 회복하는 일.


별과 안개

김승옥은 이 전치의 구조를 두 개의 감각적 장치로 포착한다. 별과 안개. 둘 다 같은 일을 한다.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


방죽의 밤, 윤희중은 개구리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처럼 느껴진다고 서술한다. 귀로 듣는 소리가 눈으로 보는 빛이 된다. 소리와 빛의 경계가 흐려진다.

감각끼리 넘나들 수 있을 때, 감정도 다른 자리로 넘어갈 수 있다. 자기 경멸이 하인숙에 대한 연민으로 옮겨간다. 개구리 소리가 별이 되듯, 감정도 다른 감정이 된다.


별은 닿을 수 없다. 보이지만 잡을 수 없다. 대리 대상도 그렇다. 아무리 강렬해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다.


수많은 개구리가 각각 혼자 울고, 수많은 별이 각각 혼자 빛난다. 군중 속의 고독. 윤희중 자신의 상태다. 전무 자리에 오르는 성공한 사위이면서,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안개가 필요했다. 별이 감각의 경계를 흐린다면, 안개는 대상의 경계를 흐린다. 안갯속에서 하인숙의 윤곽이 사라진다. 하인숙이 하인숙인지, 윤희중 자신의 투영인지 구별이 안 된다. 전치는 대상이 모호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안개가 이 조건을 물리적으로 만들어준다.


두 장치가 함께 작동하면서, 무진이라는 공간 전체가 전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된다.


증발

그래서 상경 전보가 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편지는 찢어진다. 약속은 무너진다. 자기 구원의 가능성이 찢어지는 순간이다. 윤희중은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서울에서 구할 수 없게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구원에는 비용이 있다. 하인숙을 데려가려면 이혼해야 하고, 장인 회사를 나와야 하고, 전무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 데릴사위로 쌓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윤희중은 그 비용을 치를 용기가 없다.


그리고 더 깊은 두려움이 있다. 광주역 앞의 미친 여자. 세속을 완전히 벗어나면 그 여자가 된다. 윤희중은 거기까지 갈 수 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순간 안개가 걷힌다. 전치의 조건이 사라진다. 하인숙은 다시 하인숙이 되고, 윤희중은 다시 윤희중이 된다. 그 사이에 오갔던 감정은 갈 곳을 잃는다. 본래 대상에게도, 대리 대상에게도 돌아가지 못한다. 그냥 증발한다. 안개처럼.


편지의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이 그 증발의 증거다. 감정도, 감정의 흔적까지도 사라진다.


6편의 승화와 대비된다. 승화는 고통에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에 흔적이 남는다. 문장이라는 형태, 소설이라는 형태. 전치는 형태 없이 옮기기만 하기 때문에, 대리 대상이 사라지면 형태도 사라진다


4. 돌아봄

여행지에서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상할 만큼 빠르게 끌리거나, 처음 온 장소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거나. 그리고 돌아오면 그 감정이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그 감정이 거짓이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감정의 진짜 주소가 여행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일상 속에서 향할 곳을 찾지 못한 감정이, 안개처럼 경계가 흐려진 시공간 속에서 잠시 대리 대상을 찾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전치는 로맨스 서사에서 가장 자주 작동하는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아둘 수 있다. 캐릭터가 누군가에게 빠르게, 강렬하게 끌릴 때, 그 끌림의 진짜 원인이 상대가 아닐 수 있다. 전치하는 캐릭터를 쓸 때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감정이 원래 향했어야 할 진짜 대상을 설계하는 것이다. 윤희중의 경우 진짜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진짜 대상이 자기 자신일 때, 혹은 진짜 대상에게 감정을 보내면 현실이 무너질 때 — 이것이 전치의 조건이다. 2편의 투사가 자기상을 지키기 위해 감정의 주체를 바꾸는 것이었다면, 전치는 현실을 지키기 위해 감정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 대리 대상과 진짜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설계하는 것이다. 하인숙이 윤희중의 대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인숙에게 윤희중 자신의 부서진 부분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대리 대상은 무작위가 아니다. 진짜 대상의 어떤 측면을 닮은 존재가 선택된다.


셋째, 전치가 가능한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다. 무진의 안개처럼, 일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공간. 여행, 축제, 이사, 전학 — 이런 전환의 공간에서 전치는 가장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상으로 복귀하면 전치의 조건이 사라지고, 감정은 증발한다. 이 증발을 쓸 수 있으면, 가장 강렬한 만남이 가장 쓸쓸한 결말을 갖는 서사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