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화 —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외로움

by 응시

1. 장면

토니오 크뢰거는 두 사람을 사랑한다. 금발의 한스 한젠과 금발의 잉에보르크 홀름. 둘 다 밝고, 건강하고, 평범하다. 둘 다 토니오가 아닌 세계의 사람이다.


토니오는 검은 머리의, 예민한, 예술가 기질의 소년이다. 그는 한스에게 실러의 《돈 카를로스》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한스는 말에 관한 책을 추천한다.


이 어긋남의 장면에서 토니오는 상처받지 않는다. 정확히는, 상처를 상처로 느끼는 대신 관찰한다. 이 관찰이 이 소설의 전부이자, 주지화라는 방어기제의 전부다.


2. 명명

주지화. 프로이트 이후 안나 프로이트가 체계화한 이 기제는, 감정을 사유로 대체하는 것이다. 슬픔을 느끼는 대신 슬픔에 대해 생각하고, 분노를 느끼는 대신 분노의 원인을 분석한다.


주지화는 합리화와 다르다. 합리화는 행동에 이유를 붙이는 것이고, 주지화는 감정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합리화의 결과물은 변명이지만, 주지화의 결과물은 분석이다. 주지화하는 사람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분석은 정확하다. 다만 그 정확함 속에 감정이 없다.


주지화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지적 성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은 "나는 내 감정을 느끼는 대신 이해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3. 독해

토니오 크뢰거는 지적인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 예술가인 자신과 시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알고, 그 거리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다. 한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잉에보르크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고, 그 끌림이 자신이 갖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는 것도 안다.


이 앎이 문제다. 토니오는 너무 많이 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느끼는 것을 대체해 버렸다. 한스에게 거절당하는 순간의 아픔을, 아픔으로 통과하는 대신 "예술가와 시민 사이의 본질적 괴리"로 번역해 버린다. 번역은 정확하다. 그러나 번역하는 순간 원문이 사라진다. 아픔이 통찰이 되고, 통찰이 되는 순간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토마스 만은 이 과정을 소설 전체의 구조로 수행한다. 《토니오 크뢰거》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소년 시절의 토니오와 성인 토니오 사이에 감정적 변화가 없다. 있는 것은 사유의 심화뿐이다. 더 정교하게 분석하고, 더 깊이 이해하지만, 느끼는 것은 동일하다. 아니, 느끼는 것조차 정확하지 않다. 느끼는 것에 대해 아는 것만 심화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토니오는 편지를 쓴다. 자신은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 선 존재이며, 금발과 푸른 눈의 사람들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이 고백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 자체가 주지화의 산물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관찰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가 아니라 "나는 나의 사랑이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짐을 안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지화의 비극이다. 가장 정확한 자기 인식이, 가장 완벽한 자기 회피가 될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


4. 돌아봄

"나는 내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우리 자신이 그렇다. 자기 패턴을 정확히 분석하고, 원인을 이해하고, 구조를 파악한다. 그런데 아는 것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분석은 완벽한데 삶은 그대로다.


주지화가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 아니고, 분석한다는 것은 통과한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 분석을 멈추고 감정 앞에 그냥 서 있는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끝까지 관찰자의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가 한스의 어깨를 잡고 "나는 네가 좋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 분석 없이, 번역 없이 — 이 소설은 다르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비겁함이라 부를 수는 없다. 감정 앞에 무장 없이 서는 것은, 어떤 사유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주지화는 가장 친숙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 쓴다는 행위 자체가 경험을 사유로 전환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6편의 승화와 주지화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둘 다 글로 쓴다. 둘 다 고통을 다룬다. 그런데 결과가 다르다. 차이는 온도에 있다.


온도가 있는 글은 읽고 나서 잠시 멈추게 된다. 온도가 없는 글은 읽고 나서 바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온도가 있는 글은 쓰는 사람이 아직 고통 안에 있다. 온도가 없는 글은 쓰는 사람이 고통 밖에 서서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온도가 있는 글은 문장이 떨린다. 온도가 없는 글은 문장이 반듯하다.


같은 소재를 두 방식으로 쓴다고 해보자.

승화: "어머니가 좋아하던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간을 보는 순간, 손이 멈췄다. 이 맛이었다."


주지화: "어머니를 잃은 뒤 나는 음식을 통해 상실을 재경 험한 패턴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각은 기억과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둘 다 같은 경험이다. 그런데 첫 번째 문장에서는 독자의 손도 멈추고, 두 번째 문장에서는 독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멈추는 것이 온도이고, 끄덕이는 것이 분석이다. 승화는 멈추게 하고, 주지화는 끄덕이게 한다.


토니오의 마지막 편지 — "나는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 선 존재이며, 금발과 푸른 눈의 사람들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 를 읽으면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목은 메지 않는다. 정확하지만 아프지 않다. 쓰는 사람이 이미 한 발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관찰한 뒤 정리한 문장이다.

6편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으면 목이 멘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호흡이 문장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기 글에 온도가 없다면, 그것은 주지화의 신호일 수 있다. 분석은 정교한데 문장이 차갑다면, 고통이 나에게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주지화하는 캐릭터를 쓸 때 핵심은 이 차이를 문장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캐릭터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분석은 맞다. 그런데 맞는 말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서늘함을 느낀다. 이 서늘함이 주지화의 서사적 긴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