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 — 조세희,《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다 아버지가 되는 비극"

by 응시

1. 장면

장이의 아들 영수는 굴뚝 위에서 일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 공장에서 일하고, 부당함에 분노하고, 싸운다. 그의 분노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세상이 아버지를 죽였고, 세상은 여전히 자신을 짓밟고 있다.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한국 산업화 시대의 가난한 가족을 따라간다. 아버지 '난장이'는 키가 작고, 가난하고, 세상에 의해 짓밟히는 존재다. 그가 굴뚝 위에서 공을 쏘아 올린 것은 — 무력한 사람의 유일한 반항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영수가 아버지의 자리에 선다. 가장의 무게, 세상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그 무력감을 행동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절망. 아버지는 공을 쏘아 올렸다. 영수는 분노를 쏘아 올린다. 방향은 다르지만 구조가 같다. 어느 순간 영수의 그림자가 아버지의 그림자와 겹쳐 보인다.


2. 명명

동일시. 프로이트가 말한 이 기제는 다른 사람의 특성을 자기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닮으려는 것도 동일시이고, 상실한 사람을 자기 안에 살리려는 것도 동일시다.


동일시에는 두 얼굴이 있다. 성장을 위한 동일시가 있다. 아이가 부모를 본받으며 자라는 것, 학생이 스승의 태도를 내면화하는 것. 그러나 상실에 의한 동일시도 있다. 떠난 사람이 남긴 빈자리를,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이 됨으로써 채우려는 것. 프로이트는 이것을 애도의 실패와 연결시켰다. 대상을 보내주는 대신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


문제는 이 동일시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당사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절대 그 사람처럼 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면서도, 행동과 선택의 패턴에서 점점 그 사람을 반복한다.


3. 독해

왜 동일시였을까. 영수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앞선 아홉 편의 방어기제가 왜 작동하지 못했는지를 검토해 보자.


1편의 억압이 작동하려면 감정 처리의 시간이 없어야 한다. 이 조건은 영수에게 해당된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부터 생계가 시작된다. 박완서의 화자처럼 슬퍼할 틈이 없다. 그러나 박완서의 화자가 억압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목격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았지만 당하지 않았다. 영수는 다르다. 영수는 목격자가 아니라 당사자다. 아버지의 죽음은 영수의 삶 전체를 물리적으로 바꿔놓는다. 가장이 되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 아버지의 부재가 추상적 기억이 아니라 매일의 현실이다. 밀어낼 기억이 없다 — 부재 자체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6편의 승화가 작동하려면 도구가 있어야 한다. 김연수의 화자가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라는 도구, 감정을 형태로 바꿀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수에게 이 도구가 있는가. 없다. 교육의 기회도, 표현의 매체도, 여유의 시간도 없다. 승화는 도구를 가진 사람의 방어기제다. 가난한 사람에게 승화의 경로는 차단되어 있다.


7편의 부정이 작동하려면 감정의 회로가 닫혀 있어야 한다. 뫼르소처럼 현실과 감정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야 한다. 영수에게 감정이 없는가. 넘친다. 분노가 있고, 슬픔이 있고, 억울함이 있다. 감정의 회로가 완전히 열려 있다. 부정은 선택지가 아니다.


8편의 전치가 작동하려면 감정의 진짜 대상이 위험해야 한다. 윤희중은 자기 자신에게 향할 감정을 하인숙에게 옮겼다. 영수의 감정은 누구를 향하는가. 아버지를 향한 슬픔, 세상을 향한 분노. 이 감정들은 방향이 명확하다. 옮길 필요가 없다. 전치는 감정의 방향이 불분명하거나 위험할 때 작동하는데, 영수의 분노는 방향이 분명하다.


9편의 주지화가 작동하려면 감정을 사유로 전환할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토니오 크뢰거는 분석으로 감정을 대체했다. 영수에게 그런 지적 분석의 습관이 있는가. 없다. 영수는 분석하지 않는다. 느끼고, 분노하고, 행동한다. 주지화는 감정과 사유 사이의 전환이 가능한 사람에게 작동하는데, 영수의 감정은 사유로 전환되지 않고 곧장 행동으로 간다.


동일시가 선택된 이유는, 영수에게 애도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시의 고유한 조건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동일시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상적 애도에서는 상실한 대상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인정한다. "그 사람은 떠났다. 나는 여기 있다. 우리는 다르다." 이 분리가 이루어져야 상실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애도가 불가능할 때 — 슬퍼할 시간이 없을 때, 분리를 감당할 여력이 없을 때 — 마음은 다른 경로를 택한다. 떠난 사람을 보내주는 대신, 떠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1편의 억압도 "슬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조건을 공유한다. 차이는 이것이다. 박완서의 화자는 기억을 밀어냈다. 오빠의 죽음을 의식 아래로 밀어내고, 대신 싱아의 감각이 올라왔다. 영수는 밀어낼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이 기억이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가 매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밀어내봤자, 내일 아침 그 빈자리가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억압 대신 동일시가 작동한다. 빈자리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자기가 채우는 것이다. 아버지를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심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조가 이 동일시를 강제한다. 이 사회에서, 이 구조 안에서,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애도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10편의 동일시와 6편의 승화를 나란히 놓으면 계급의 문제가 드러난다. 김연수의 화자는 승화할 수 있었다 — 도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수는 승화할 수 없다 —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도구의 유무는 교육과 여유의 문제이고, 교육과 여유는 계급의 문제다. 같은 상실 앞에서 누구는 승화하고 누구는 동일시한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다.


영수가 아버지의 자리에 서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다. 아버지를 보내줄 수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패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영수의 의지는 진심이다. 아버지의 무력감, 아버지의 체념, 아버지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영수를 움직인다. 그러나 바로 이 의지 자체가 동일시의 통로가 된다.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아버지를 기준점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반대를 선택하는 것도 같은 축 위에 있다.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반대편에 선 것이다. 5편의 반동형성과 닮은 구조다. 반동형성이 감정을 반대로 뒤집되 같은 축 위에 있는 것이듯, 동일시에서의 거부도 반대 방향이지만 같은 축 위에 있다.


조세희의 서사가 잔인한 것은 이 구조적 반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장이의 가족은 세대를 넘어 같은 자리에 있다. 물리적 조건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 동일시가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돌아봄

"나는 절대 부모처럼 되지 않겠다." 이 다짐을 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부모의 화내는 방식, 대화법, 관계 패턴을 보면서 "나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한 경험.

그런데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부모의 표정을 발견한다. 화가 났을 때의 입 모양이, 피곤할 때의 한숨이, 누군가를 대하는 톤이 부모와 닮아 있다. 닮지 않으려 했는데 닮아 있다.


이것이 동일시의 힘이다. 거부한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의 강도만큼 연결은 깊어진다.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나에게는 이 사람의 것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사람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이 두 문장을 동시에 말할 수 있을 때, 동일시는 자기 인식이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동일시는 세대를 넘어가는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엔진이라는 것을 알아둘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 물려받는 것은 역할만이 아니라 심리 구조 전체다.


동일시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애도의 실패. 제대로 보내주지 못한 사람만이 동일시의 대상이 된다. 캐릭터에게 애도의 시간을 빼앗는 것 — 가난, 전쟁, 급변하는 상황 — 이 동일시의 서사적 조건이다. 둘째, 빈자리의 즉각성. 1편의 억압도 시간 부재를 조건으로 했지만, 억압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고 동일시는 빈자리를 자기가 채우는 것이다. 빈자리가 추상적 기억이 아니라 물리적 현실일 때 — 가장의 부재, 생계의 공백 — 동일시가 작동한다.


그리고 이 편과 6편을 나란히 기억해 둘 수 있다. 같은 상실이라도, 도구가 있으면 승화하고 도구가 없으면 동일시한다. 캐릭터에게 어떤 자원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같은 죽음이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반복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를 설계하는 것이, 계급을 쓰는 작가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