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리려는 행위 속에 숨은 죄의식"
1. 장면
아이의 눈에 세상이 보인다. 전쟁 직후의 마을, 상처 입은 어른들, 죽음과 가까운 공기. 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마을에서 자라는 아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그린다. 아이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다.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앎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아이의 죄의식은 기묘하다. 아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보았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목격자의 죄. 알아버린 사람의 죄. 아이는 이 죄를 갚으려는 듯, 반복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한다. 뜰을 정리하고, 무언가를 제자리에 놓고, 질서를 회복하려 한다. 무너진 세계의 한 조각이라도 되돌려놓으려는 듯이.
2. 명명
취소. 프로이트가 말한 이 기제는,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려는 상징적 행위다. 물리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의례적 행위를 통해 심리적으로 취소하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쁜 말을 한 뒤 과잉 친절을 베푸는 것, 잘못을 저지른 뒤 반복적으로 손을 씻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소한 것들을 강박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취소의 예다.
취소의 핵심은 마법적 사고에 있다. 이 행위를 하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된다는 무의식적 믿음. 이 믿음은 비합리적이지만, 그래서 더 강력하다. 논리로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독해
왜 취소였을까. 이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목격자의 죄의식이다. 전쟁이 남긴 폐허, 어른들의 상처, 죽음의 냄새. 아이는 이것을 보았고, 이해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앞선 열한 편의 방어기제가 왜 작동하지 못했는지를 검토해 보자.
1편의 억압은 가능했다. 박완서의 화자도 전쟁의 기억 앞에서 억압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정희의 화자는 기억을 밀어내지 않는다. 전쟁 직후의 마을 풍경을 매우 선명하게 기억하고 서술한다. 감각의 디테일이 살아 있다. 1편의 박완서 화자가 싱아의 감각은 기억하되 오빠의 죽음은 흐려진 것과 다르다. 오정희의 화자에게는 전체가 선명하다. 억압되지 않은 기억이다.
2편의 투사가 작동하려면 감정을 돌릴 대상이 있어야 한다. "전쟁을 일으킨 어른들이 나쁘다"는 식으로. 그러나 이 아이의 죄의식은 타인의 잘못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목격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죄의 원천이 자기 안에 있다. 투사는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인데, 이 아이의 죄의식은 "내가 보았다"에서 온다. 바깥에 돌릴 것이 없다.
3편의 합리화가 작동하려면 논리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이였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의 죄의식은 논리적이지 않다. 합리화는 논리로 감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이 죄의식은 논리 이전의 것이다. 논리적으로 아이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7편의 부정이 가능했을까. 뫼르소처럼 감정의 회로가 닫혀 있었다면,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 감정의 회로는 열려 있다. 죄의식이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부정은 해당되지 않는다.
11편의 격리가 가능했을까. 영혜처럼 감정을 사건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 감정은 분리되지 않았다. 기억도 선명하고, 죄의식도 선명하다. 사건과 감정이 함께 있다. 격리는 작동하지 않았다.
취소가 선택된 이유는, 이 아이의 죄의식이 마법적 사고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취소의 고유한 조건이다. 아이는 세계와 자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세계의 재앙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자기 탓으로 여기는 아이, 누군가의 죽음을 자기가 막지 못했다고 느끼는 아이. 이 마법적 사고 — 내가 무언가를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의 연장선에서, 취소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이 일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앞선 편들과의 결정적 차이는, 죄의식의 성격에 있다. 3편의 라스콜니코프에게도 죄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죄의식은 실제로 행한 일(살인)에서 온 것이다. 합리화가 무너진 자리에서 죄의식이 밀려왔다. 오정희의 아이에게는 행한 일이 없다. 본 것뿐이다.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의식 — 이것은 논리적 방어기제로 처리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죄의식 앞에서, 마음은 논리 대신 행위로 응답한다. 상징적 행위. 의례적 행위. 취소다.
뜰을 정리하는 것이 취소의 행위다. 뜰은 집과 바깥 사이의 경계 공간이다. 안전한 집도 아니고, 위험한 바깥도 아닌, 그 사이의 장소. 아이가 이 경계 공간을 정리하고 가꾸는 행위는, 무너진 세계의 경계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질서와 혼돈을 나누고, 삶과 죽음을 분리하려는 시도.
그러나 뜰은 정리되지 않는다. 아이가 아무리 정리해도 세계는 계속 무너진다. 어른들은 계속 상처 입고, 죽음은 계속 가까이 있다. 취소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 하기 때문에, 행위는 끝나지 않는다. 정리해도 정리해도 정리가 되지 않는다. 죄의식은 줄어들지 않고, 행위만 반복된다. 이 반복이 취소와 10편의 동일시를 잇는 지점이다. 동일시에서 영수는 아버지의 패턴을 반복했다. 취소에서 아이는 정리의 행위를 반복한다. 반복은 해결이 아니라 미해결의 증거다.
오정희의 문장이 유독 정교한 것, 한 문장 한 문장이 조심스럽게 배치된 것은 — 작가 자신의 취소 행위일 수 있다. 유년의 혼돈을 문장의 질서로 다시 배열하는 것. 이것은 6편의 승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취소이기도 하다. 승화가 고통에 형태를 부여하되 온도를 남기는 것이라면, 취소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되 혼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승화는 변환이지만, 취소는 복원의 시도다. 변환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만, 복원은 이전의 것을 되찾으려 한다. 되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반복된다.
4. 돌아봄
청소를 강박적으로 하게 되는 밤이 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책상을 정리하고, 불안할 때 옷장을 뒤집는 경험. 물리적 공간의 질서가 심리적 혼란을 상쇄해 줄 것이라는 무의식적 기대.
이것이 취소다. 그리고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책상을 정리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옷장을 깨끗이 해도 마음은 어지럽다. 그런데도 다시 정리한다. 행위의 반복 자체가 위안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 무력하지 않다는 착각.
착각이라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취소의 행위가 현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현실을 견디는 동안의 시간을 벌어준다. 다만, 정리가 끝나지 않는다면, 정리하고 있는 것이 책상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언젠가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취소하는 캐릭터의 핵심은 반복적 행위와 그 행위의 무효성 사이의 간극에 있다. 행위를 할수록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데도 멈추지 못하는 인물. 이 반복이 서사의 긴장을 만든다.
취소의 조건을 앞선 편들 과 비교하면, 고유한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비논리적 죄의식. 3편의 합리화가 논리를 필요로 했다면, 취소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다. 논리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죄의식이 있을 때. 아이의 심리, 목격자의 심리, 살아남은 자의 심리가 이 지형에 속한다. 둘째, 마법적 사고. 행위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무의식적 믿음. 이 믿음이 행위를 반복시키고, 반복이 멈추지 않는 것이 서사의 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