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 않다는 말이 슬픔인 세계"
1. 장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소설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 중 하나. 이 문장의 충격은 내용이 아니라 톤에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일 날씨를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구별되지 않는다.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더위를 느낀다. 그 다음날 해수욕을 가고,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본다. 이 행동들이 나중에 법정에서 그를 유죄로 만드는 증거가 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 사회가 그를 유죄로 판결한 진짜 이유는 살인이 아니라 이것이다.
2. 명명
부정. 프로이트가 말한 이 방어기제에는 두 층위가 있다.
첫 번째 층위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해고를 통보받고도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는 것, 진단서를 받아 들고도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사는 것.
이것은 극단적 상황에서 작동한다.
사실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의식이 사실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두 번째 층위는 사실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실은 의식에 들어온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감정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슬프다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실과 의미 사이의 회로가 열리지 않는 것이다.
뫼르소는 두 번째 층위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장례식에 간다. 관 앞에 앉는다. 사실을 차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이 아무런 감정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이 문장에서 충격적인 것은 사실의 부정이 아니라 의미의 부재다. 죽었다는 것은 안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를 모른다 — 혹은, 어떤 뜻도 도착하지 않는다.
이 두 번째 층위의 부정은 첫 번째보다 알아차리기 어렵다.
첫 번째 층위의 부정은 현실 검증에 의해 깨질 수 있다. 장례식에 가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층위의 부정은 사실을 받아들여도 깨지지 않는다. 사실 앞에 서 있으면서도 감정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는 고통이 없어 보인다. 주변에서는 "강하다"라고 말한다. 실은 강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도착할 회로가 열리지 않은 것인데.
11편에서 다룰 격리와의 차이도 여기서 드러난다. 격리는 감정이 있다가 분리된 것이다. 한때 느꼈던 감정을 사건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부정의 두 번째 층위는 감정이 생성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격리는 있던 것을 끊는 것이고, 부정은 오지 않는 것이다.
3. 독해
왜 부정이었을까. 뫼르소에게 일어난 일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그 앞에서 다른 방어기제는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억압할 수 없었을까
1편의 억압이 작동하려면 감정 처리의 시간이 없어야 한다. 뫼르소에게 시간이 없는가. 없지 않다. 장례식에 다녀오고, 다음 날 해수욕을 가고, 일상은 이어진다. 시간은 있다. 그런데 기억을 밀어내지 않는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장례식에 간다.
사실은 의식에 있다. 억압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고, 부정의 첫 번째 층위는 사실을 밀어내는 것이지만, 뫼르소에게 작동하는 것은 부정의 두 번째 층위다. 사실은 남아 있고, 감정만 도착하지 않는다. 억압과의 차이가 여기서 선명해진다. 억압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고, 부정(뫼르소 유형)은 의미를 밀어내는 것이다. 기억은 있되 의미가 없다.
투사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분노나 슬픔을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분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투사하려면 감정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투사할 것이 없다.
합리화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이미 연세가 많았고, 양로원에서 편안하게 지내다 가셨으니 슬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뫼르소에게 합리화의 편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합리화는 감정을 느낀 뒤에 그 감정에 이유를 붙이는 것이다. 뫼르소의 경우, 감정 자체가 도착하지 않았다. 합리화할 감정이 없다.
부정이 작동한 이유는, 뫼르소의 심리 구조에서 현실과 감정 사이의 연결 회로가 처음부터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방어기제들은 감정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억압은 감정이 붙은 기억을 밀어내고, 투사는 감정의 방향을 바꾸고, 합리화는 감정에 이유를 붙인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정은 다르다. 부정은 감정이 도착하기 전에 작동한다. 현실은 의식에 들어오지만, 현실이 감정으로 변환되는 단계가 차단된다. 사실은 있되 의미가 없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사실과 감정 사이의 회로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 회로가 왜 닫혀 있는가. 소설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뫼르소의 삶 전체가 단서다. 그는 어머니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양로원에 보낸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거리감이 부정의 토양이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상실의 충격은 크고, 충격이 클수록 다양한 방어기제가 동원된다.
그러나 관계 자체가 희미할 때, 상실은 충격으로 도착하지 않는다. 충격이 없으니 방어할 것도 없고, 감정이 생성되지 않으니 처리할 것도 없다. 부정은 이렇게, 감정의 부재처럼 보이는 형태로 작동한다.
소설을 자세히 읽으면, 뫼르소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리의 몸을 욕망하고, 태양의 열기에 짓눌린다. 감각은 살아 있다. 사라진 것은 감각과 의미 사이의 연결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결하지 못한다. 슬픔을 느껴야 할 자리에서 슬픔의 감각은 있되, 그것이 슬픔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해변에서 아랍인을 쏘는 장면. 뫼르소의 설명은 "태양 때문이었다"이다. 감정과 의미가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은 감각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태양의 열기, 빛의 눈부심, 몸의 불쾌감. 이 감각들이 의미의 여과 없이 곧장 행동으로 이어진다. 판단이 없다. 감정이 없다. 있는 것은 감각과 행동뿐이다.
법정은 뫼르소에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후회보다는 권태를 느낀다고 답한다. 이 답변이 사회를 분노하게 만든다. 그러나 부정 상태에서 후회는 가능하지 않다. 후회하려면 자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면 현실과 감정의 회로가 열려야 한다. 뫼르소에게 그 회로는 닫혀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처형을 앞두고 비로소 무언가를 느낀다. 밤하늘의 별을,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이것이 부정의 해체인지, 아니면 부정의 마지막 변주인지는 독자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음이라는 최종적 현실 앞에서야 비로소 무언가가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4. 돌아봄
"괜찮아"라는 말을 너무 빨리 하는 순간이 있다. 큰일을 겪고도 놀라울 만큼 담담한 사람이 있다. 주변에서 "강하다"라고 말한다. 본인도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괜찮다는 말이 너무 빠른 것은, 괜찮지 않다는 감정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부정은 강함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본인조차 자신이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뫼르소의 비극은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느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마음이 닫아놓은 문 뒤에서, 감정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문이 있을 수 있다. 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닫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뫼르소와는 다른 자리에 설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부정하는 캐릭터가 가장 설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인물은 서사의 동력을 잃기 쉽다. 그러나 뫼르소가 소설사에서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인 이유는, 감정의 부재 자체가 서사가 되기 때문이다. 부정하는 캐릭터를 쓸 때 핵심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회로가 닫혀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감각은 살아 있되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상태. 이 간극을 문장으로 드러낼 수 있으면, 가장 담담한 캐릭터가 가장 강렬한 서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