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가"

by 응시

1. 장면

이 소설 속에서 누군가 죽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쓰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문장은 정확하고, 호흡은 길며, 감정은 절제되어 있다. 울부짖는 문장은 없다. 대신 파도가 있다. 바다가 있다. 그리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라는 조건절이 있다.


이 조건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라면.'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 받아들이고 싶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상실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지만, 아는 것과 견디는 것 사이의 거리를 이 한 글자가 담고 있다.


2. 명명

승화. 프로이트가 명명한 방어기제 중 유일하게 긍정적 평가를 받는 기제다.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나 고통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 예술, 학문, 봉사, 창작.


그러나 승화의 긍정성을 너무 빨리 강조하면 핵심을 놓친다. 승화는 고통이 사라져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고통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 고통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점토를 빚는다고 해서 점토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승화는 고통의 해소가 아니라 고통의 변환이다.


그래서 승화에는 언제나 원래의 고통의 흔적이 남는다. 가장 아름다운 시에 슬픔의 결이 배어 있고, 가장 정교한 소설에 상처의 온도가 남아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승화된 작품에서 원래의 고통을 완전히 지워버리면, 그것은 승화가 아니라 은폐다.


3. 독해

왜 승화였을까. 화자가 직면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 앞에서 작동할 수 있는 방어기제를 하나씩 점검해 보자.


억압할 수 있었을까. 죽음의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기억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을 정밀하게 소환한다. 죽은 사람의 습관, 말투, 함께한 시간의 질감. 이 기억들이 소설의 재료가 된다. 억압은 선택지가 아니다.


부정할 수 있었을까.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죽음을 안다. 부정하지 않는다. 조건절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이 보여주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 수용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 부정은 모르는 것이고, 이것은 알면서 견디는 것이다.


퇴행할 수 있었을까. 세계를 축소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장한다. 상실의 경험을 언어로 펼치고, 문장으로 넓히고, 서사로 구축한다. 퇴행과 정반대 방향이다.


승화가 선택된 이유는, 화자에게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도구. 1편에서 아이가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도구의 부재였다면, 여기서 화자가 승화할 수 있는 이유는 도구의 존재다. 고통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서사적 감각, 감정을 직접 방출하는 대신 형식 안에 담을 수 있는 절제력. 이 세 가지가 승화의 조건이다.


그래서 승화는 아무에게나 작동하지 않는다. 승화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고통을 변환할 매체를 다룰 줄 아는 기술. 작가에게는 문장이, 화가에게는 붓이, 음악가에게는 악기가 있다. 이 기술이 없는 사람에게 같은 상실이 찾아오면, 승화 대신 다른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억압하거나, 부정하거나, 신체화된다. 승화는 방어기제 중 가장 숙련된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가장 성숙한 기제라고 말한 것이다.


김연수의 문장이 정확한 것은 승화의 증거다. 상실 앞에서 문장이 정확해진다는 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언어를 구조물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 글자도 흐트러지지 않는 문장은, 한 순간도 흐트러지면 안 되는 사람이 쓴 문장이다.


승화가 단순한 카타르시스와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을 방출한다. 울고 나면 시원하다. 그러나 승화는 감정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형식을 부여한다. 화자는 울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울음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쓴다. 그 형태가 문장이고, 그 문장들의 집합이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슬프면서 동시에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 동시성이 승화의 고유한 효과다. 고통에 형태가 생겼기 때문에,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접 만지면 데는 것을, 유리 너머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리가 문장이다.


다만 승화에는 대가가 있다. 쓰는 사람은 고통을 형태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 고통과 오래 머물러야 한다. 빨리 떠나면 형태가 완성되지 않는다. 화자가 상실 이후에도 계속 쓰는 것, 끝내지 못하는 것, 조건절로 문장을 맺는 것은 — 승화의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 문장이 "파도는 바다의 일이다"가 되는 날, 승화는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승화란, 완성되지 않는 것을 계속하는 행위 자체인지도 모른다.


4. 돌아봄

글을 쓰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종종 이런 질문이 찾아온다. 이것을 왜 하는가. 이것을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프로이트의 대답은 명료하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실은 돌아오지 않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생긴다.


형태가 생기기 전에는, 고통이 곧 나다. 분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픔 자체인 상태. 그런데 고통이 문장이 되고, 서사가 되고, 한 편의 글이 되는 순간, 고통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내가 아픔인 상태에서, 내가 아픔을 가진 상태로. 이 전환이 승화의 핵심이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고통에는 거리가 생긴다. 거리가 생기면 세 가지가 가능해진다.


바라볼 수 있다. 안에 있을 때는 볼 수 없다. 물속에 있으면 물을 볼 수 없듯이. 밖으로 나와야 물이 보인다. 형태가 생기면 고통의 바깥에 서게 된다. 처음으로 자기 고통을 볼 수 있게 된다.


선택할 수 있다. 안에 있을 때는 고통에 의해 움직인다. 밖에 서면 다가갈 수도 있고 물러설 수도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겠다, 다음에 더 보겠다. 이 선택권이 생기는 것이 거리의 힘이다.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이 나인 동안에는, 고통이 끝나려면 내가 끝나야 한다. 고통이 내 것이 되면, 고통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내 옆에 있지만 나를 삼키지는 않으니까.


이 편의 본문에서 쓴 문장이 정확히 이것이다. "직접 만지면 데는 것을, 유리 너머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리가 문장이다." 유리가 곧 거리이고, 거리가 곧 형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과거의 고통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과, 현재의 고통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다르다.


과거의 고통은 이미 멈춰 있다. 그래서 형태가 완성될 수 있다. 거리가 생기고, 바라보고,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다. "파도는 바다의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고통은 멈춰 있지 않다. 쓰는 동안에도 고통이 계속된다. 형태를 부여하려 하지만, 재료가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그릇이 넘친다. 그래서 반복이 생긴다. 같은 주제를 다시 쓰고, 또 쓰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멈추고, 다시 처음부터 쓰고. 조건절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이 반복은 승화의 실패가 아니다. 승화의 과정이다. 완성된 승화는 작품이 되고, 미완의 승화는 버팀이 된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은, 쓴다고 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쓰는 동안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쓰면서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 나에게서 떨어지는 중이라는 증거다.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반복에서 한 걸음 더 가려면 한 가지가 필요하다. 같은 감정을 다른 형태로 담아보는 것이다. 같은 슬픔을 매번 같은 문장으로 쓰면 반복이 되지만, 같은 슬픔을 다른 구조, 다른 인물, 다른 시점으로 담으면 승화가 시작된다. 형태가 바뀌면 거리가 바뀌고, 거리가 바뀌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승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파도처럼, 끝나지 않는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