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형성 — 염상섭, 《삼대》

"무관심한 척하는 사람의 진짜 감정"

by 응시

1. 장면

조덕기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할아버지 조의관의 구시대적 욕망에도, 아버지 조상훈의 위선에도, 김병화의 사회주의적 열정에도, 그는 한 발 물러서 있다. 관찰자의 위치. 냉정하되 적대적이지 않은 거리. 이 소설에서 모든 인물이 무언가를 격렬하게 원할 때, 덕기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염상섭의 《삼대》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삼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소설이다. 할아버지 조의관은 재산과 여자에 탐욕스럽고, 아버지 조상훈은 기독교를 앞세우며 위선적이고, 손자 덕기는 —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염상섭은 이 가장 조용한 인물을 소설의 중심에 놓았다. 왜일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덕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덕기의 무관심은, 진짜 무관심이 아닐 수 있다.


2. 명명

반동형성. 프로이트가 말한 이 기제는 이름 자체에 구조가 들어 있다. 반동, 즉 반대 방향으로의 형성.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때, 정반대의 감정을 의식의 표면에 형성하는 것이다.


미움을 감당할 수 없으면 과잉 친절로, 욕망을 감당할 수 없으면 과잉 금욕으로, 분노를 감당할 수 없으면 과잉 무관심으로. '과잉'이 반동형성의 서명이다. 진짜 무관심한 사람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반동형성에 의한 무관심은, 무관심해야 한다는 노력이 수반된다.


3. 독해

왜 반동형성이었을까. 조덕기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삼대에 걸친 가문의 수치심이다. 할아버지의 탐욕, 아버지의 위선, 그리고 자기 자신도 결국 그 혈통 안에 있다는 사실. 이 앞에서 앞선 네 편의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검토해 보자.


1편의 억압이 작동하려면 감정 처리의 시간이 없어야 한다. 박완서의 화자는 전쟁 중의 급박함, 생계의 절박함 속에서 기억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덕기에게 이 조건은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덕기에게는 시간이 있다. 교육받은 청년으로서 관찰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다. 그리고 억압은 과거의 기억에 작동하지, 현재 진행형의 현실에는 작동하기 어렵다. 할아버지의 축첩, 아버지의 교회 활동, 가문을 둘러싼 금전 분쟁은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밀어낼 기억이 아니라, 매일 마주치는 현실이다.


2편의 투사가 작동하려면 지켜야 할 자기상이 있어야 한다. 《날개》의 화자에게는 '천재'라는 자기상이 있었고, 그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무능의 원인을 아내에게 옮겼다. 덕기에게 이런 과대한 자기상이 있는가. 없다. 덕기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키려는 자기 이미지가 뚜렷하지 않다. 투사할 필요가 없다. 투사는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라고 방향을 바꾸는 것인데, 덕기가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다. 분노는 바깥으로 향하지만 수치심은 안으로 향한다. 수치심은 "저 사람이 나쁘다"가 아니라 "나는 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투사로는 이 연결감을 끊을 수 없다.


3편의 합리화가 작동하려면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덕기에게 이 능력은 있다. 교육받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합리화는 행동을 정당화할 때 작동한다. 라스콜니코프에게 합리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행동하려 했기 때문이다. 덕기의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감정이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수치심, 분노, 혐오 — 이 감정들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행동에 이유를 붙이는 합리화로는 감정 자체를 처리할 수 없다.


4편의 퇴행이 작동하려면 고통에 이름이 없어야 한다. 파씨에게 고통의 원천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존재 조건 자체의 무게였다. 덕기는 다르다. 덕기의 고통에는 이름이 있다. 할아버지의 탐욕, 아버지의 위선. 원천이 구체적이다. 누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정확히 안다. 이름 있는 고통 앞에서 퇴행은 선택되지 않는다. 퇴행은 적이 보이지 않을 때의 방어이고, 덕기에게 적은 — 적이라 부를 수 없는 가족이라는 점이 문제이지만 — 보인다.


반동형성이 선택된 이유는, 덕기의 위치가 감정 표현이 불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동형성의 고유한 조건이다. 다른 방어기제들은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다. 밀어내거나(억압), 옮기거나(투사), 논리를 붙이거나(합리화), 크기를 줄이거나(퇴행). 반동형성은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뒤집어서 표면에 고정하는 것이다.


왜 뒤집어야 하는가. 감정 표현 자체가 사회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조선의 교육받은 청년. 할아버지에게 분노하면 불효이고, 아버지를 경멸하면 패륜이고, 사회주의에 동조하면 위험하다. 어떤 감정도 표현하면 자기 위치가 무너진다. 억압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지만, 덕기의 경우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이 문제다. 투사는 감정을 바깥으로 보내는 것이지만, 수치심은 바깥으로 보낼 수 없다. 합리화는 행동에 논리를 붙이는 것이지만, 감정 자체를 처리하지 못한다. 퇴행은 이름 없는 고통에 작동하지만, 덕기의 고통에는 이름이 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감정 자체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는 것이다. 분노를 무관심으로. 수치를 냉정함으로. 혐오를 관조로. 이렇게 하면 감정은 표면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 안전하다. 그리고 이 안전이 사회적 보상을 받는다. 덕기의 무관심은 주변에서 "침착하다", "어른스럽다"로 읽힌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교양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반동형성은 미덕의 외형을 갖는다. 이것이 반동형성이 다른 방어기제보다 오래 유지되는 이유다. 사회가 그것을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동형성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방어기제다. 진짜 감정을 억누르면서 동시에 반대 감정을 유지해야 하니까. 이중의 노동이다. 소설 곳곳에서 그 비용이 균열로 드러난다. 할아버지의 축첩에 대해 말할 때의 약간의 경직, 아버지의 교회 활동을 바라볼 때의 미묘한 냉소, 김병화와의 대화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한마디. 이것들은 무관심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무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반동형성의 껍질에 생긴 미세한 금이다.


덕기가 소설 내내 피곤해 보이는 것, 결정적 순간마다 행동하지 못하는 것,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그 원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 — 이 모든 것이 반동형성의 비용이다. 무관심을 연기하느라 진짜 관심을 행동으로 옮길 에너지가 남지 않는 것이다.


《삼대》는 결국 덕기가 유산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삼대의 역사를 이어받는다. 거부하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은 채. 이 애매한 결말이 반동형성의 가장 정직한 초상이다. 반동형성은 해결이 아니라 보류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관심 아래에서 분노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4. 돌아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우리 자신이 그런 말을 자주 할 때가 있다. 부모의 기대에, 연인의 태도에, 직장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럴 때 한 가지를 물어볼 수 있다.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면, 왜 그 말을 해야 하는가. 진짜 무관심은 무관심하다는 선언이 필요 없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문장이 반복될수록, 그 아래에는 신경 쓰이는 무언가가 자라고 있을 수 있다.


조덕기는 결국 무관심의 대가를 치렀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결과,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어졌다. 무관심은 안전해 보이지만, 가장 비용이 큰 감정일 수 있다. 진짜 감정을 누르면서 동시에 가짜 감정을 유지해야 하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동형성하는 캐릭터의 핵심은 '과잉'의 설계에 있다. 과잉 친절한 인물은 미움을 숨기고 있고, 과잉 냉정한 인물은 격정을 숨기고 있다. 과잉의 방향이 진짜 감정의 반대를 가리킨다. 이것이 반동형성 캐릭터의 독법이다 — 표면에 보이는 것의 정반대가 진짜다.


그리고 반동형성이 선택되려면, 앞선 네 편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아야 한다. 밀어낼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일 것(억압 불가). 감정의 원인을 옮길 대상이 없을 것(투사 불가). 행동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문제일 것(합리화 불가). 고통에 이름이 있을 것(퇴행 불가). 이 네 가지가 모두 해당되면서, 추가로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 감정 표현이 사회적으로 불가능할 것. 불효가 되거나, 체면이 무너지거나, 관계가 파괴되거나, 위험에 처하거나. 이 사회적 조건이 인물의 시대와 위치에서 나올 때, 반동형성은 필연이 된다.


덕기를 현대에 옮겨놓으면 어떨까. 대기업 3세가 아버지의 비리를 알면서도 '침착한 후계자'를 연기하는 인물. 독실한 가정의 딸이 부모의 신앙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착한 딸'을 유지하는 인물. 시대가 바뀌어도 반동형성의 구조는 같다. 진짜 감정을 표현하면 자기 위치가 무너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반대 방향의 감정을 표면에 올리고, 그 표면을 유지하느라 소진된다.


마지막으로, 반동형성 캐릭터의 가장 강력한 장면은 균열의 순간이다. 무관심의 표면에 금이 가는 찰나. 덕기의 미묘한 냉소, 불쑥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한마디. 이 순간에 독자는 표면 아래의 진짜 감정을 엿본다. 반동형성 캐릭터를 쓸 때, 균열의 순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가 서사의 긴장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