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세계가 무너질 때 인간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by 응시

1. 장면


파씨는 평범한 사람이다. 특별한 재능도, 특별한 불행도 없다. 직장에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세계가 요구하는 만큼의 크기로 살아간다. 황정은의 소설 《파씨의 입문》은 이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문을 열지 않기로 하는 이야기다.

정확히는, 세상과의 접촉을 줄여나간다. 일을 그만둔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점점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소설은 이 과정을 극적 사건 없이 따라간다. 누가 파씨를 해치지 않는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파씨는 그저 줄어든다. 활동 반경이, 관계가, 언어가 줄어든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방향의 차이가 중요하다.

마치 성인이 유년의 크기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포기도 아니다.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파씨 자신도 말하지 못한다.


2. 명명


퇴행. 프로이트는 이것을 발달의 역방향 운동이라 했다. 현재의 발달 단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만났을 때, 마음이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퇴행을 단순히 '유치해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핵심을 놓친다. 퇴행은 유치함이 아니라 피난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지금보다 안전했던 시절이 있었고, 마음은 그 시절의 방식을 다시 불러온다. 어른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린 시절의 음식을 찾거나, 이불속에 웅크리거나,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 퇴행이다.

중요한 것은, 퇴행에는 방향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 곳으로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한 사람의 퇴행 양상을 보면, 그 사람이 언제까지 안전했는지를 역으로 알 수 있다


3. 독해


왜 퇴행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앞선 세 편에서 확인한 방어기제의 조건들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1편에서 억압의 조건은 감정 처리의 시간 부재였다. 전쟁 중, 생계의 급박함 속에서 슬퍼할 틈이 없을 때 마음은 기억을 밀어냈다. 파씨에게 이 조건은 해당되지 않는다. 파씨에게는 시간이 있다. 오히려 시간이 너무 많다. 일을 그만두고, 관계를 줄이고, 방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시간의 부재가 아니라 시간의 과잉이다. 억압은 밀어낼 기억이 있을 때 작동하는데, 파씨에게는 밀어내야 할 특정 사건이 없다.

2편에서 투사의 조건은 지켜야 할 자기상이었다. '천재'라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무능의 원인을 아내에게 옮겼다. 파씨에게 지켜야 할 자기상이 있는가. 없다. 파씨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특별해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투사할 필요가 없다. 지킬 것이 없으니까.

3편에서 합리화의 조건은 지적 능력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논리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합리화를 선택했다. 파씨에게 그런 지적 언어가 있는가. 파씨는 자기 상태를 분석하거나 설명하는 인물이 아니다. "나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세우지 않는다. 합리화는 언어를 가진 사람의 방어기제인데, 파씨의 고통은 언어 이전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 퇴행의 고유한 조건이 드러난다. 파씨가 직면한 것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존재 조건 자체의 무게다. 세계가 요구하는 크기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일하라, 관계하라, 성취하라. 이 요구들은 특정 가해자가 보내는 것이 아니다. 세계 전체가 보내는 것이다.

억압할 기억이 없다 — 고통의 원천이 특정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사할 대상이 없다 — 가해자가 없기 때문이다. 합리화할 논리가 필요 없다 —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파씨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행동의 부재가 파씨의 상태이고, 부재에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

반동형성은 어떤가. 5편에서 다룰 조덕기처럼, 고통의 반대 — 과잉 활력, 과잉 사교성 — 을 표면에 형성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반동형성은 감정을 반대로 뒤집어 유지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파씨에게 그 에너지가 없다. 반동형성은 사회적 역할이 강제될 때, 감정 표현이 불가능할 때 작동한다. 파씨는 사회적 역할 자체를 내려놓고 있다. 뒤집을 감정이 아니라, 감정 자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퇴행이 선택된 이유는, 파씨의 고통에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 사건에서 오는 고통에는 이름이 있다. 오빠의 죽음, 아내의 지배, 가난의 공포.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에 맞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기억을 밀어내거나, 원인을 옮기거나, 논리를 세우거나. 그러나 이름이 없는 고통 — 존재 자체의 무게, 세계가 요구하는 크기와 자기 크기 사이의 간극 — 앞에서는 이 도구들이 모두 공회전한다. 밀어낼 기억이 없고, 옮길 원인이 없고, 세울 논리가 없다.

이름 없는 고통 앞에서 마음이 할 수 있는 것은,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세계가 요구하는 어른의 크기에서,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크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퇴행이다. 다른 방어기제들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이라면, 퇴행은 고통을 처리하지 않고 자기를 축소하는 방식이다. 고통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자기를 작게 만들어서 고통이 위로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파씨가 돌아가는 곳은 방이다. 이불이다. 최소한의 세계. 이 목적지가 파씨의 과거를 말해준다. 퇴행의 방향은 항상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곳을 가리킨다. 파씨에게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크기가 방 하나라는 것은, 그보다 큰 세계에서는 안전했던 적이 없다는 뜻일 수 있다.

황정은의 서사가 특별한 것은, 퇴행을 문제가 아니라 입문이라 부른 데 있다. 제목의 '입문'은 보통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그런데 파씨가 진입하는 곳은 앞이 아니라 안이다. 바깥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다. 퇴행이 곧 입문이 되는 이 역설 속에, 황정은은 하나의 질문을 심어놓는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앞인가. 세계가 정해놓은 방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진짜 입문이 아닌가.

프로이트의 틀 안에서 퇴행은 미성숙의 징표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프로이트에게 조용히 반문한다. 성숙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성숙이라면, 그 속도에 부서지는 사람은 미성숙한 것인가. 파씨의 퇴행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와 자기 사이의 거리를 재조정하는 행위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회복의 서사로 끝나지 않는다. 파씨가 다시 바깥으로 나가 이전의 삶을 회복하는 장면은 없다. 회복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퇴행한 자리에서 발견하는 것, 축소된 세계 안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 그것을 황정은은 입문이라 부른다.


4. 돌아봄


가끔 우리는 이유 없이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세상은 그것을 나태라 부르고, 의지의 부족이라 부른다.

그러나 파씨를 읽고 나면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순간의 나는 나태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 것은 아닌지. 퇴행이 피난이라면, 피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전쟁 중에 방공호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왜 밖에 서 있지 않느냐"라고 묻지는 않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할 수 있다. 피난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라는 것을. 파씨의 입문이 가능했던 것은, 방 안에 머무는 것을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퇴행하는 캐릭터를 설계할 때 세 가지를 물어야 한다.

첫째, 이 인물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퇴행의 목적지가 인물의 과거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음식을 찾는 인물,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물, 방 안에 웅크리는 인물 — 각각의 목적지가 각각의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마지막으로 안전했던 곳이다. 인물이 방으로 돌아간다면, 방보다 큰 세계에서는 안전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고향을 떠난 이후 안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목적지의 크기가 인물의 안전 반경을 보여준다.

둘째, 이 인물의 고통에 이름이 있는가. 앞선 세 편에서 확인했듯, 이름 있는 고통에는 그에 맞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특정 기억이면 억압, 특정 대상이면 투사, 특정 행위면 합리화. 퇴행이 선택되려면, 고통에 이름이 없어야 한다. 이름 없는 고통 — 존재의 무게, 세계와의 간극, 설명할 수 없는 피로 — 이 퇴행의 조건이다. 캐릭터가 "왜 힘든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때, 그 인물은 퇴행의 후보다.

셋째, 이 인물이 돌아간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퇴행이 단순한 도피로 끝나면 서사가 멈춘다. 황정은이 퇴행을 입문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축소된 세계 안에서 파씨가 무언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작가가 설계해야 한다. 퇴행한 자리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비극이고, 무언가를 발견하면 변환이다. 어느 쪽이든, 퇴행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퇴행을 통과한 인물은, 같은 크기로 돌아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