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는 사람들 안의 작은 권력
궁녀는 모두 같은 처지였을까.
아니다. 궁녀 안에도 위계가 있었다. 궁궐의 여성 조직을 내명부(內命婦)라 불렀다. 내명부 안에는 정1품에서 종 9품까지 품계가 있었고, 이 품계가 궁녀의 자리를 정했다.
가장 위에 상궁(尙宮)이 있었다. 정 5품. 수십 년을 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 아래에 나인(內人)이 있었다. 나인 아래에 생각시(生覺氏)가 있었다. 수습 궁녀였다. 품계가 없었다. 궁궐에서 가장 낮은 자리였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인정받으면 나인이 됐다. 인정받지 못하면 그 자리에 남았다.
상궁은 나인에게 명령했다. 나인은 생각시에게 명령했다. 위에서 아래로. 궁궐 바깥의 신분 제도가 궁궐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했다. 다만 바깥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위계였고, 안에서는 상궁과 생각시의 위계였다. 이름만 달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상궁도 궁녀였다. 나인도 궁녀였다. 생각시도 궁녀였다. 모두 궁이라는 제도 안에 갇힌 사람이었다. 모두 혼인이 금지됐고, 외출이 제한됐고, 왕의 시간에 맞춰 살았다. 같은 조건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위계가 작동했다.
억압받는 집단 안에서 내부 위계가 생기는 것. 이것은 궁궐만의 현상이 아니다.
기생 시리즈에서도 같은 구조를 다뤘다. 기방 안에서 기생들 사이에 자리가 있었다. 가운데 자리와 가장자리. 인기 있는 기생이 가운데 앉았고, 인기 없는 기생이 가장자리에 앉았다. 둘 다 기생이었다. 둘 다 같은 기방에서 같은 조건으로 살았다. 그런데 누구는 빛이 닿는 곳에 앉았고, 누구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앉았다. 억압받는 집단 안에서 누가 더 위인지를 정하는 구조.
심리학에서 이것을 '미세 권력'이라고 부른다. 큰 권력이 없는 곳에서 작은 권력이 생기는 현상이다. 전체적으로 무력한 집단일수록 내부의 위계가 정교해진다. 바깥에서는 아무 힘이 없으므로, 안에서라도 힘의 차이를 만들어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상궁의 권력은 바깥에서 보면 미미했다. 왕 앞에서 상궁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인 앞에서 상궁은 절대적이었다. 나인의 하루를 결정하고, 벌을 내리고, 승진을 좌우했다. 왕에게 무력한 사람이 나인에게는 강력했다. 위에서 받은 무력감을 아래에서 보상하는 구조.
이 구조가 만드는 심리적 효과는 복잡하다.
상궁의 입장에서. 자기도 억압받고 있다. 왕의 시간에 맞춰 살고, 밖에 나갈 수 없고, 혼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인 앞에서는 권한이 있다. 이 권한이 유일한 자기 확인이다. 나인에게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이 자리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준다. 이 감각을 유지하려면 위계를 유지해야 한다. 위계가 무너지면 자기 확인도 무너진다.
나인의 입장에서. 상궁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유는 상궁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상궁이 위이기 때문이다. 위라는 것 외에 다른 근거가 없는 권력에 복종하는 경험. 이것이 반복되면 "위에 있는 사람은 옳다"는 신념이 생긴다. 권력과 정당성을 동일시하게 된다. 나인이 상궁이 되면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아래에서 당한 것을 위에서 되풀이한다.
생각시의 입장에서. 품계가 없다. 위계의 가장 아래에 있다. 올라갈 수 있지만 보장되지 않는다. 상궁은 나인에게라도 권한이 있고, 나인은 생각시에게라도 권한이 있다. 생각시에게는 아래가 없다. 아래가 없는 사람은 무력감을 보상할 곳이 없다. 무력감이 쌓인다.
궁궐의 위계는 정교했다. 정교할수록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알았다. 자기 자리를 안다는 것은 안정감일 수도 있고, 체념일 수도 있다. 올라갈 수 있다고 믿으면 안정감이고, 올라갈 수 없다고 알면 체념이다.
내명부의 기록에는 품계와 직책이 남아 있다. 누가 상궁이 됐는지, 누가 어느 전각에 배치됐는지. 구조는 남아 있다. 구조 안에서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위계는 기록된다. 위계 안의 감정은 기록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