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 - Conversations with myself
빌 에반스를 아는가? 요즈음엔 모르기가 쉽지 않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목록에 재즈가 포함돼 버리는 바람에 챗 베이커를 모르면 음알못이고 빌 에반스를 모르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삼파이더맨 그림이 그런 의미로 들어간 것은 아니고, 아무튼 취향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마침내 스노비즘 에라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빌 에반스를 알면 현학적인 대화를 좋아하는 밥맛이라는 소리는 전혀 아니다. 현학적인 대화를 좋아한다고 밥맛이라는 소리도 아니다. 시작을 잘못 끊은 것 같은데, 아무튼 필자는 빌 에반스의 팬이다. 비록 하낫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빌 에반스를 이해하고 싶어서 빌 에반스의 연주 기법에 대한 논문을 찾아봤을 정도다. 사실 얄팍하게 아는 만큼 자랑할 것은 전혀 없지만, 누군가가 이런 얄팍한 필자를 붙잡고 빌 에반스 최애 앨범을 구태여 묻는다면 뉴런을 짚어가며 꼽을 만한 앨범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기타리스트 짐 홀Jim Hall과의 듀엣 엘범인 Undercurrent고, 나머지 하나는 빌 에반스 솔로 앨범인 Conversations with myself다.
Conversations with myself는 빌 에반스 혼자서, 하나의 곡을 세 개의 트랙으로 쪼개고 각각을 따로 연주해 오버더빙하는 방식으로 완성한 앨범이다. 과거-현재-미래로 해석되기도, 자기 자신과의 솔로잉-콤핑 가위바위보로 해석되기도 하는 이 앨범은 하나의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빌 에반스 혼자 서로 다른 트랙을 세 번 연주하고 하나로 모으는 방식으로 작업되었다. 그렇다, 이제 왜 삼파이더맨 그림이 들어간 지 알아주시지. 말하자면 이 앨범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멀티버스 빌 에반스들을 묶어 동시에 연주하게 만든 느낌의 앨범인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3번 트랙인 ‘Spartacus Love Theme’인데, 초반부터 음악의 멜로디라인을 이끄는 중음부와 이를 받치고 있는 저음부, 귀를 간지럽게 만드는 고음부가 귀를 사로잡는다. 중간으로 가서는 고음부가 멜로디를 견인하고, 근음만 치는지 단순한 저음부와 빌 에반스의 왼손을 맡는 듯한 또다른 저음부가 ‘한 명이 세 손으로 치고 있나 본데’하는 완벽한 조화를 만든다. 음악은 텐션을 당기기도, 밀기도 하면서 계속 이어지다가 이윽고 3분대에서 긴장을 점차 조이기 시작한다. 3분 40초경에는 충실히 멜로디를 전개하는 중음과 왼쪽 위에서 휘몰아치는 트레블, 두 옥타브의 같은 음으로 선율을 고조시키는 고음까지, 4개의 서로 다른 음역대에서 풍부하게 소리를 펼쳐낸다.
이 앨범의 또다른 매력은 믹싱에 있다. 세 명의 빌 에반스가 있다면, 한 명의 에반스는 중앙 정면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고, 또다른 한명은 살짝 오른쪽에서, 나머지 한 명은 완전히 왼쪽 귀에서만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 덕분에 노래는 조화롭게 하나로 들리면서도 분명한 구분감을 만든다. 왼쪽 귀에서 고음이 들리다가도 연주가 저음으로 내려오면, 아 이번에는 고음을 연주하던 에반스가 저음으로 내려왔구나,라고 구분이 가능할 정도다. 이런 친근하고도 영리한 장치의 활용이 있을까, 같은 기법을 가진 연주자의 구분을 패닝으로 구현한 셈이다. 더군다나 한 명의 에반스는 한 손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음이 너무 복잡하게 엮여 들리지 않는다. 에반스가 항상 두 손을 사용한다고 하면, 이 앨범은 세 명의 에반스가 총 세 개의 손을 사용하니 말하자면 1.5에반스인 셈인데,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 ‘레스 이즈 모어’와 ‘다다익선’은 결코 상반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2로 나누고 3을 곱하세요’와 1.5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여담이지만, 브라이언 윌슨의 ’Smile’ 앨범을 들어본 적 있는가. 팝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발매 앨범, 베이퍼웨어(나온다고 했는데 나오지 않은 것)로 유명한 앨범이다. 비치 보이스의 전 멤버로 보컬이자 베이스였던 브라이언 윌슨은 1966년 비틀즈의 Revolver를 듣고 충격을 받았고, 이를 넘어서겠다는 마음으로 Smile의 제작에 착수했다. 하지만 전작 Pet Sounds부터 시작된 부담감으로 그는 앨범을 완성시키지 못했고, 특히 비틀즈의 ‘Penny Lane/Strawberry Fields Forever’ 싱글을 듣고는 완전히 단념해버렸다. 그럼에도 캐피톨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1971년 Smile의 일부를 추리고 새 곡을 넣어 Lo-Fi 스타일로 편곡한 Smiley Smile을 발매했지만 기존의 의도는 담기지 않았고, 그 이후 앨범들에 조금씩 Smile의 곡들을 넣었는데 이는 팬들에게 ‘언젠가 완전체 Smile이 온다’는 기대감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대에 넘어와 비치 보이스와 브라이언 윌슨의 음악적 성과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는데, 이를 발판삼아 브라이언 윌슨은 1993년 컴필레이션 박스 세트 ‘Good Vibrations : Thirty Years of The Beach Boys’를 발매한다. 이 박스 세트에 Smile 세션의 음원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브라이언 윌슨도 여기에 개인적인 후련함을 가졌는데 오히려 Smile 완전체에 대한 팬들의 기대가 하늘을 뚫어버리게 된 바람에 그는 60년대 당시 파티에서 만나 앨범 작업을 함께했던 반 다이크 파크스를 다시 불러 마침내 Smile을 완성시켰다. 이렇게 해서 2004년에야 나온 앨범이 Brian Wilson presents Smile로, 그 깐깐하다는 피치포크에서 9점을 받고 명반의 반열에 올랐다.
40년 전의 자신의 작업물에 다시 손을 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제 서른의 삶에 입문했으니 아마 20년 뒤에 내가 마무리하지 못한 초등학교 방학숙제가 떠올라 다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겠다.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3개월 전에 짠 코드는 남이 짠 코드’라는 유머가 있는데, 40년 전에 시작한 음악이라면 사실 정말 남의 음악이 아니었을까. 빌 에반스의 Conversations with myself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열대간 간극이 짧은 편이라면, Smile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열대간 간극이 총 40년이니 어떤 의미로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conversations with myself’였겠다. 재즈로 시작해서, 바로크 팝까지. 오늘의 마무리는 귀가 풍요로우니 행복한 잠에 들겠다.
*Some time legends 는 흥미로운 앨범들에 대한 리뷰 모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