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 서교호텔
어릴 적에는 주머니에 항상 스무 장짜리 유희왕 카드를 넣어 다녔다. 흠집이 나지 않도록 카드를 예쁜 비닐에 하나씩 싸서 구겨지지 않도록 주머니에 조심히 넣었다. 투명한 비닐 속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레어 카드'나 '울레(울트라 레어)' 카드는 어린아이의 자존심이며 세상에 맞서는 무기였다. 2000년대 초중반, 그 당시에는 대부분 그랬다. 설령 당신이 유희왕 카드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유희왕 카드를 모를 수는 없으리라. 호신용 유희왕 카드가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유희왕 카드라는 것은 만화 '유희왕'에 나오는 카드게임인데, 몬스터 카드나 마법 카드, 함정 카드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상대의 생명력(라이프)를 0으로 만드는 게임이었다. 동네에는 유희왕 카드만을 취급하고, 카드게임('듀얼'이라고 불렀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듀얼존'이라는 가게도 있었다. 이상하게 '듀얼존'에는 어린아이보다 어른이 더 많았다. 은신처처럼 자유롭게 드나들기에는 이유없이 눈치가 보이곤 했다. 때문에 또래 아이들은 아무 아파트의 계단에 앉아서, 말하자면 야매로 듀얼을 즐겼다. 친구가 없을 때에는 카드뭉치를 반으로 나눠 나 스스로와 듀얼을 즐기기도 했다. 얼음땡이나 지탈(지옥탈출)에 동네마다의 룰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동네에서는 '한 카드뭉치에는 최소 스무장 이상의 카드가 들어가야 한다'는 룰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가장 마음에 드는 카드 스무 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놀이라는 것은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온라인 게임이 성행한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옛날에 즐겼던 유희왕 카드나 딱지, 에어빵, 또는 그런 것과 유사한 어느 것이던 아이들이 밖에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파트의 계단, 놀이터의 미끄럼틀 위, 그네의 바이킹으로 쉴 새 없이 돌아다녔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고 새로운 아이들은 피시방에서 열심히 게임을 한다. 그런 모습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인터넷에서 유희왕 카드와 같은 아련한 노스텔지아를 발견할 때마다 '놀이'가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논다'고 표현했는지 떠올리게 된다. 그래, 나 이런 걸 하고 놀았었지.
화분의 <서교호텔>이 바로 그런 느낌의 음악이다. 그래, 나 이런 걸 듣는 게 좋았었지, 이런 게 음악의 재미지, 떠올리도록 만드는 음악.
화분은 2009년 결성된 밴드로 쌈바를 좋아하는 다섯의 뮤지션이 모여 만들었다. 카페, 바, 라이브 공연장과 같은 다양한 장소에서 라이브를 했고 2012년 1집 앨범 <화분>을 냈다. 밴드명과 동명인 이 데뷔 앨범은 밴드의 터질 듯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아내기 벅차다는 듯 트랙의 수만 14개, 플레이타임은 1시간을 자랑한다. 한편, 개편된 5인조 그룹으로 발매된 2집 <서교호텔>은 브라질리언 장르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구분으로 6개 트랙만을 컴팩트하게 담았다. 1집의 절반도 되지 않은 트랙 수의, EP에 더 가까운 구성의 정규앨범. 하지만 화분은 긴 재생시간의 1집에도 미처 담지 못한 것들을 오히려 2집에서 여유롭게 담은 것처럼 보인다.
<서교호텔>에 수록된, 동일한 분위기를 공유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여섯 개의 곡은 꼭 어릴 때 즐겼던 유희왕 카드, 딱지, 에어빵, 끈끈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놀이들이 서로 다른 재미와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큰 틀에서 '놀이'일 뿐이었던 것처럼, 화분은 다양한 색감의 트랙들을 한 손에 모아 그들의 음악이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공유하는지 양 손을 활짝 펼치듯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귀로만 들리는 이 여섯 개의 트랙들에서 얼굴도 모르는 다섯 멤버의 표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다섯 멤버 모두 활짝 웃으며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 뚜렷하게 들린다.
바로 그게 나를 웃게 만든다. 웃는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 때문에. 화분의 <서교호텔>이 좋은 이유는,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유희왕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느꼈던 것과 동일한 행복을 화분 또한 느끼고 있음이 음악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2v6FM7TST68&list=PLyU85MJPtG87Wsu6aps-V1WfpjTh4ugBR&index=3
가장 좋은 트랙은 3번 트랙인 '파도'. 오션드럼이 묘사하는 파도 소리, 작은 장난감 북을 치는 듯한 기타의 소리, 바이브레이션 없이 순수한 혼성의 멜로디, 사운드를 꽉 채우는 베이스기타와 후반부의 피아노 솔로. 엄청난 수준의 연주 또는 음색이나 구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물론 어렵겠지만, 이미 두고두고 이야기했듯 절제된 연주 속에 절제되지 않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반복해 들어도 도저히 질리지가 않는다.
듣자마자 생각이 났던 앨범은 The Blank Shop의 <Tailor>. 재즈 피아니스트인 윤석철이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잔뜩 펼친 앨범으로, <Tailor>라는 말 그대로 재단사로 분해 선우정아, 하헌진, 원필, 이진아, 백예린 등의 뮤지션들에게 맞춤옷(음악)을 선사하는 앨범이다. 그런 만큼 개별 트랙에서 윤석철 본인의 특징은 최대한 축소되고 아티스트의 개성이 최대한의 광택을 내고 있는데, 완전히 다른 아티스트들의 곡 모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앨범으로서 구심력을 갖는다는 점이 신기하다.
윤석철은 매주 월요일마다 홍대의 재즈클럽 에반스에서 잼데이의 호스트를 맡고 있다. 필자가 처음 접한 재즈곡 중 하나가 윤석철 트리오의 <Db in April> 에 수록된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였다. 듀크 조던의 <Flight to Denmark>,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We Get Requests>, 빌 에반스의 <Walts for Debby> 앨범들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에 끼어 있는 단 하나의 윤석철 트리오 곡이었는데, 아무리 재즈를 몰라도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종류의 유쾌함에 반해 그 트랙 한 곡을 계속계속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이 가진 냄새가 너무 짙은 바람에, 언젠가의 월요일에 나는 홍대역으로 달려가 김밥 레코즈에서 윤석철 트리오의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를 충동적으로 구매했고 에반스 클럽에 가서 윤석철 씨에게 사인을 받았다. 자신의 좌우명이 '즐겁게, 음악'이라며 윤석철 씨는 씨디에 좌우명을 사인으로 적어 주었고 사인된 씨디와 함께 '한주님도 즐겁게, 음악입니다'하며 낯을 가리는 기원을 건네 주셨다. 처음에는, '즐겁게, 음악'이 윤석철 트리오의 첫 번째 EP 앨범의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구절이 기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개인적 선언으로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사인을 받은 김에, 또 오랜만의 재즈바가 궁금했던 김에 앉아서 윤석철 씨의 1부 연주를 들었는데 그 연주가 모두 끝났을 때에야 내 마음이 활짝 열렸고, 2부의 재밍 세션에서 등장한 윤석철의 멜로디언 연주에 이르러서는 내 마음을 아예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고 두 번째로 산 윤석철의 앨범이 바로 The Blank Shop의 <Tailor>. 앨범을 듣자 마자, 윤석철 씨가 사인으로 써 준 '즐겁게, 음악'을 앨범으로 빚는다면 <Tailor>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트랙들을 하나로 엮어준 그 구심력은 아마 윤석철 씨의 '즐겁게, 음악'이 아니었을까. 같이 음악 듣기를 즐기는 박사 후배도 함께 앨범을 구매하면서 '일반적으로 끌리는 고자극의 앨범들이 "여자친구" 같다면 이 앨범은 "배우자"같다'는 오묘한 감상을 공유해 주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aGbfSNPuaY
본론으로 돌아와서. 음악 뿐 아니라 무엇이든 - 아직도 유희왕 카드가 좋은 어린아이의 호들갑을 더하자면 인생이라는 것 또한 어쩌면 - '놀이'와 같은 방식이라야 좋지 않을까. 너도나도 힘들 때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각자의 유희왕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든든한 위로를 받는 것. 오늘은 주머니 속 <Tailor>와 <서교호텔>이 있으니 세상에 맞설 무기를 양 손에 쥔 기분으로 든든하다.
*Some time legends 는 흥미로운 앨범들에 대한 리뷰 모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