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미학, Cornelius <Point>

Cornelius - Point

by 두리안


한창 책에 꽂혀 있을 때의 기억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빈자의 미학>이라는 이름의 에세이집을 낸 적이 있다. 그가 건축가로서 20년간 말하고 싶었던 말들이 짧은 에세이책에 담겼다. 그가 그려낸 단순한 평면도와 그것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책 중간마다 그의 호흡처럼 담겨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웃돈을 주고 중고로 구매해야 했다. 언젠가 친구가 선물해 주었던 구마 겐고의 <점·선·면>과 함께 책장에 꽂아 두었고, 후에 건축과에 입학한 친구에게 빌려준 기억이 있다. 몇 개의 파편적인 기억들이 더 있지만, 아쉽게도 책 자체는 더이상 책장에 없다. 어디에 꽂혀 있을지에 대한 예감조차 없다.

<빈자의 미학>을 영문으로 번역하면 ‘Beauty of Poverty’다. 따라서 빈자는 곧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 책의 맥락에서 더 정확히 이해하자면 ‘가난하고자 하는 자가 스스로 비워내며 만드는 미학’에 가깝다. 또다른 건축가 반 데어 로에가 말한 ‘Less is more’나, 애플에 지대한 영향을 준 브라운과 비초에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Less, but better’과도 꽤나 유사하다. 비움의 추구미는 건축이나 디자인 뿐 아니라 사회 철학과 다양한 문화에서도 ‘미니멀리즘’이라는 명명어로 드러나 왔다. 동양 예술 특유의 ‘여백의 미’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Less is more’에서도, 생텍쥐페리의 ‘완벽함이란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는 말에서도 ‘미니멀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것은 변주가 아닌 반복에 가깝다.

따라서 빈자의 미학은 승효상 단 한 명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순 없겠다. 이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어쩌면 나 또한 <빈자의 미학>의 가치관을 실천했을지도 모른다.


Cornelius(이하 코넬리우스)의 <Point>는 음악으로 실현한 빈자의 미학이다. 음악계에서 미니멀리즘 사조는 철학과 예술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부터 테리 라일리, 라 몬테 영을 지나 전설적인 앰비언트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 20세기 후반에는 필립 글래스와 같은 작곡가들에게도 이어졌다. 따라서 2001년에 발매된 코넬리우스의 4집 앨범 <Point>는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이 그렇듯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감은 여타의 미니멀리즘과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코넬리우스는 <Point> 이전의 3집 앨범까지는 음악에 다양한 장르와 음표들을 가득 채우는 데에 집중했다. 일종의 맥시멀리즘적 접근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는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천천히 다음 앨범인 <Point>를 작업했으며, 발매 후 앨범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Fantasma>(3집)은 하나의 레이어 위에 여러 가지 샘플이 겹쳐 있거나, 음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서, 공간이 별로 없는 만들기였지만, <Point>에서부터 공간을 의식하기 시작해, ‘사이로 만든다’라는 감각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gr4DrH2B-s


필자는 하나의 앨범이 동일한 사운드를 유지하며 일관된 주제를 선보이는 예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사람마다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앨범 단위로 — 그리고 트랙 순서대로 —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잘 짜여진 코스 요리를 먹는다는 감상이 있다. 하나의 앨범이 동일한 사운드를 고수하는 것은 단단한 기반 위에 다양한 음악적 표현들을 빚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청취 환경에서 나처럼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이런 성실한 음악적 시도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음악적 성격이 유사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재즈 앨범이나 일부 락 음악에서는 제약된 악기에서 오는 다양한 사운드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인 밴드나, 일렉트로닉 성격을 갖는 장르에서는 사운드 자체에 적용되는 다양한 시도들에 더 큰 감흥을 느끼는 편인 것 같다. 코넬리우스의 <Point>는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다. 세계일주를 하듯, 하나의 앨범에서 다양한 사운드를 구사하면서도 코넬리우스 본인이 말한 ‘사이로 말하는’ 감각은 날이 선 듯 정확하게 전달된다.


역시나 발매된 지 조금 된 앨범이지만, 현재까지도 K-pop 등에서 명맥이 이어지는 하이퍼팝 유행을 선도했던 100gecs가 2023년 발매한 정규 2집 <10000 gecs>에도 유사한 맛이 있다. 10개의 트랙 하나하나의 완결성이 뛰어나며, 모든 트랙에서 ‘슈팅스타’를 베어무는 것만 같은 톡 톡 튀는 사운드를 구사하지만 앨범의 장르를 규정하자면 벽에 부딪힌다. 모든 트랙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미니멀리즘의 예시는 아니지만, 다양한 변동성을 갖는 트랙들에 하나의 구심력을 부여해 단일 앨범으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코넬리우스의 <Point>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변동성은 일종의 유머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음악적 방향성을 보여주면서도 자신의 방향성이 장르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쾌한 장치. 하지만 그 장치를 성공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음악 전반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이해와 애정이 필요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2PWMiy4RysI


내 책은 어디 있을까. 웃돈을 적당히도 아니고, 열심히 모은 용돈 전부를 바쳐서, 그것도 초판본을 샀는데 어디에서도 보이지가 않는다.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여담이지만, 소설책 중에서도 즐거움이 중복되지 않는 <빈자의 미학>을 실천하는 책들이 더러 읽힌다. 가장 애정하는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가 그랬고, 배수아 작가의 단편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맥시멀리즘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미니멀리즘의 정서만큼 매력적이었고, 단편소설집은 아니지만 시바타 쇼의 장편소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미니멀리즘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며, 동일하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생각하고, 이중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은 그 중에서도 정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또한 맥락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방향성 없는 하루키의 방향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와는 반대되는 시선으로 매년 챙겨읽는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은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기에 공통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빈자의 미학>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아쉬워하지 말고 그만 놓아주는 게 <빈자의 미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코넬리우스의 <Point>를 듣는다.


아마도 몇 번은 더 들어야지만 더 이상 아쉽지 않게 될 것 같다.



*Some time legends 는 흥미로운 앨범들에 대한 리뷰 모음입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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