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벌써 5일이 지났다. 앞으로 이틀이 더 지나면 1년간 익숙했던 2025라는 숫자에 햇수가 하나 늘어난다.
매년 초마다 나는 어려움을 겪는다. 연도를 적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예를 들자면 행정 서류에서) 바뀐 숫자가 익숙하지 않아 이전 해의 연도를 적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살씩 늘어나면서 그 정도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어쨌든 나는 이틀이 지나자 마자 한 달 동안은 '2025'라는 숫자를 '2026'으로 바꾸느라 고생할 예정이다. 간단한 일이지만 그 숫자를 놓쳤다가는 몇 개의 메일을 다시 보내야 하니 생각보다 훨씬 거슬리는 일이다.
올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께서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책을 더 읽으라는 의미로 주신 게 아니고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어머니가 내게 그 책의 뒷면을 들어보였을 때에 나는 그게 하루키의 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우연찮게도 이미 이 책을 읽은 친구가 런닝을 권하기도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작가기도 해서 서점을 기웃거릴 때마다 눈에 든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읽을 책'으로 책장에 꼽아 두는 것은 역시 처음이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이후 5일간 내가 이 책을 읽었느냐? 역시 읽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대신에 영화 리뷰를 유튜브에 검색하는 류의 귀찮음으로 책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보기만 했다. 구글이 이 책을 달리기의 효능을 설파하는 내용이라기 보다 달리기와 글쓰기를 비교하며 문학적인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해 준 덕분에 책을 밀어낼 이유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어디선가 글쓰기에 관한 하루키의 가치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쓸 때에는 굴튀김이 아닌 것들을 쓰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었다. 굴튀김과 나 사이에 있는 것들, 굴튀김이 담긴 접시, 또는 굴튀김과의 거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굴튀김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하루키가 일편단심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단순히 '글쓰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 주변시에 걸려 있는 '달리기'를 소재로 삼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가장 깊숙이에 있는 것들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물론, '달리기' 또한 하루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시에 들어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음악을 듣는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무슨 음악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들었는지 낱낱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음악을 들을 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편이 더 진솔할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음악 대신 더 깊숙이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겠다는 작정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을 쓰겠다는 계획은 전혀 없고, 눈을 돌리다가 하루키의 책을 발견했을 뿐이다. 구구절절 말을 하다 보면 오히려 음악 이야기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음악과 어떤 종류의 유사함을 지닌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어쨌건, A를 볼 때 B가 주변시에 있다면, B를 볼 때에도 A가 주변시에 있다는 뜻이니까.
어릴 때에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물론 요즈음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갖고 있는 음악 감상에 대한 애정조차 그 때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여느 십대와 같이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고, 친구들과 그것들을 나눴을 뿐이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폴 아웃 보이의 큰 팬이었는데, 2013년 그 그룹이 해체하고 4년만에 갑자기 복귀했을 때 내게 울면서 전화했다. 어떤 친구는 뮤즈와 미카의 광팬이었고, 친해지고 싶어 일부러 이어폰을 뺏어 들은 다른 친구의 미키마우스 mp3에는 CCM이 가득 차 있기도 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라서, 그 때에는 빨간색 닥터드레 헤드폰을 쓰고 다니는 친구 무리가 있었고, 그들과 종종 다투며 가리온과 이센스를 듣는 무리가 있었다. 음악적 취향이 비교적 뚜렷하고 애정 또한 비교적 깊은 시절이었다. 나는 어땠냐,고 물으면 나는 제이슨 므라즈를 듣는 쪽이었다. 콜드플레이, 제임스 모리슨, 에릭 베넷과 몇 곡의 스티비 원더(대부분 올드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잭슨을 듣는 편이었다. 장기자랑 준비를 하다가 샤이니의 노래를 자주 듣기도 했지만 무리를 나누자면 영어 선생님이 틀어주는 팝송을 흥얼거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누군가가 복귀한다고 울면서 친구들에게 전화할 정도의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무언가에 홱 끌리는 것에 반해 끈기는 별로 없는 편이라서,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신나게 향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하다간 그림 그리기에 빠지고, 디자인과로 이중전공을 준비하다간 커피에 빠지고, 그러다가 또 다른 것들에 눈이 데굴데굴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사람은 닻을 내리려는 본능을 가진 동물인지, 야속하게도 그 대부분의 관심들은 이제 풍화되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여자친구는 작년에 서랍을 정리하다간, 어릴 때에 해변가에 갈 때마다 주웠던 작고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 둔 함을 발견했다. 가장 아꼈던 투명한 초록색 돌들이 사실 누군가가 해변에 버리고 깨진 소주병의 조각들이었다고, 그걸 이제 알았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말하자면 그런 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열심히 문지르고 닦아내다간 어느 순간에는 그것들을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중에 떠올리게 되면 그것들이 의미없이 반짝이는 소주병 조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아마 내 서랍을 열어보면 반짝이는 초록색 조약돌들이, 붙여 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채로 잔뜩 쌓여있겠지. 간혹 오랜만에 꺼낸 바지 주머니에서, 잘 매지 않던 가방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USB 안에서 그 조약돌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아쉽거나 낯부끄러워지는 대신에 어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들이 내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어서, 그걸 닦았을 내 모습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그런 것들을 말하게 된다. 오랫동안 내가 쥐고 있는 조각들, 아직 놓거나 잃어버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꼭 쥐고 싶은 것들을. 반짝 타오르는 것들보단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들이 사실 더 큰 애정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중인 것 같다. 그래도, 저 아직 음악을 듣는 일은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소금기가 묻은 차가운 초록색 조약돌을 반질반질하게 닦아보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오래 유지하려면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동경심, 적당한 꾸준함과 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졌다가는 자글자글한 모공이 보이고, 너무 동경했다가는 스스로가 초라해져 보이고, 너무 꾸준하면 지치기 마련이고 너무 잘 이해했다가는 고이지 않을까 싶다. 진중하게 하는 생각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있어보이기 위한 너스레에 가까운 말이지만 스스로 고개를 적당하게 끄덕일 수 있는 진단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그런 성질을 유지하는 것들에는 또 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책을 읽는 일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일과 큰 차이가 있을까. 매체가 다르고 감상하는 몸의 자세가 다를지언정 그것들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다.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유희로, 어느 정도는 애정과 동경으로 음악을 듣듯이 무작위의 책을 읽을 뿐이다. 차를 몰고 출근할 때에는 음악을 듣고, 버스로 출근할 때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 외에는 음악과 책을 감상하는 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 만큼 감상하는 방법이나 자세에 있어서도 둘은 내게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읽는 개인적인 자세는 이렇다.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것들을 읽고, 재미있지 않은 것들은 밀어둔다. 총균쇠나 호메로스는 읽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읽었지만, 스콧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지금에 와서 찾아 읽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건 내가 한국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토지'는 읽지 않았고, 대신 박경리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단편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지만 김영하 작가의 소설집은 거의 읽지 않았고, 그렇다고 작가를 가리는 편은 아닌 듯 싶은게 매년마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편식 없이 읽고 있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다 또 흥미가 식으면 구석으로 밀어두는 식이다. 심한 편식증이 일관적이지도 않아서,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은 읽기도 전에 싫다고 눈을 뗐지만 '쇼코의 미소'를 쓴 최은영 작가와 헷갈려서 읽어 본 '단 한 사람'만큼은 정말로 좋았다. 자기관리형 책이나 다정한 에세이는 읽지 않지만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나 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은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에는 한로로의 '자몽살구클럽'을 절반쯤 읽다가 다시 펼쳐보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어딜 가서 책을 좋아한단 소리를 못 하는 것이다.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시추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산 저 산을 제 마당처럼 쏘다니는 심마니도 아니고, 그냥 싸구려 뷔페의 중식 코너에서 입맛에 맞는 몇 개의 음식들을 들고 와 먹기와 떠들기를 반복할 뿐이니까(그렇다고 좋아하는 작품들이 싸구려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어딜 가서 중식을 좋아한다고 말을 할 수가 있나. 아는 작가나 소설 이야기가 나오면 한 마디 거들고 혼자 뿌듯해할 뿐인 거다.
음악을 듣는 일도 마찬가지다. 비틀즈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음악 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이해하지만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런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장르적 구분이 아닌 시대적 구분이라고 생각하는 브릿팝 또한 잘 듣지 않고, 반대로 포스트 브릿팝으로 대표되는 라디오헤드는 앨범마다 몇 번씩 돌려듣는다. 웃기게도브릿팝의 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폰테인즈D.C는 또 재미있게 듣고 있다. 굳이 가장 취향에 맞는 음악 장르를 고르라면 네오사이키델리아에 가깝다고 말하겠지만, 피쉬맨즈는 좋으면서도 잘 모르겠고 막달레나 베이의 '이메지너리 디스크'가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이었으나 이 장르에서 가장 좋은 앨범을 꼽으라면 고민도 없이 혁오의 '사랑으로'를 꼽겠다. 최근에는 일렉트로니카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들어보고 있지만 깊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늘은 키라라의 영상을 보고 키라라를 주욱 들었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서 윤석철에게서 느낀 감동을 곱씹게 된다.
그러니까,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것 또한 어디까지나 얕은 편식가의 메모에 불과하다. 익명의 힘을 빌려 전문적인 척 잡다한 리뷰를 쓰는 건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책장 맨 윗칸에 더 좋아하는 책들을 꽂아 놓는 것처럼, 한 톨의 애정을 무기로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긴 부연을 적을 뿐의 일이다. 아직 몇 편 올리지도 않았지만 흐릿한 주변시에 벌써부터 보이는 내 무안함을 2025년을 갈무리하는 글에다가 슬쩍 미리 끼워 넣는다. 저는 고작 소주병을 깨는 장인입니다. 그 장인이 고심해서 고른 빈 소주병을 2026년에도 깨고 적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니까 말이 계속 붙는다. 한 마디를 하면 다음 마디가 떠오르고, 다음 마디를 적는 동안 그 다음 이야기가 생각난다. 음악을 들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던가. 진솔함에 조금씩 다가가는 만큼 그 주위를 소용돌이 모양으로 햄스터처럼 돌고 있을 뿐이니, 이 글을 올해의 마지막 주제로 삼은 내가 원망스럽다. 이대로라면 이틀이 더 지나고 이 글의 발행년도에 적힌 숫자 '2025'를 조용히 지워 '2026'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아직 아무런 말도 맺지 않았지만, 글을 편식한다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마무리를 짓자면, 남의 글을 읽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형태로 쓰여지지 않은 것들, 그 이전에 내 관심의 주제로조차 쓰이지 않은 글들이 한바닥이니까. 음악도 마찬가지고,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브런치도 그런 공간이다. 최신순으로 정렬된 무작위의 글들을 하나씩 꺼내서 몇 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공간. 해변의 모래처럼 좋아하지 않을 글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앎에도 반짝이는 보석을 줍겠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때문에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기 위함이 아니고 철저히 자기만족에 가깝다. 그런 만큼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히 감사한 마음이다. 무게가 없이 부피뿐인 글을 붙잡고 오랫동안 쳐다봐 주셨다는 의미니까. 그 인내심이 감사하다. 이렇게 아무런 맥락 없이 주저리 주저리, 지면을 채우듯 써내고 혼자서만 속시원해하는 글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글이 네 배로 길어졌을 것 같습니다. 저도 조금의 참을성을 발휘했답니다. 그래도, 빨간 닥터드레 헤드폰을 쓰는 무리와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을 듣는 무리가 있듯이, 제가 더 애정하는 글의 무리에 머릿수 하나를 더 가담해 보겠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는 일은 더욱 기쁘다. 가끔 좋아요 알림이 오면 눌러준 사람의 브런치를 놀러가 글을 읽어 본다. 브런치의 오늘의 좋아요 순위 탭에서 아무 생각없이 몇 분간 스크롤을 내리다가 랜덤한 글을 눌러 읽어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그런 인연으로 '자정의 크리스마스'라는 작가분의 '당신의 세계 밖에서'라는 글을 읽었는데, 재미있고 뭉클해서 조용히 좋아요를 누르고 구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분도 언젠가 알림을 보고 놀러오셨는지 간간히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셨다. 그러고 나니 괜시리, 그 분의 댓글에 대댓글을 달고 그 분의 다른 글에도 좋아요를 눌러드리면 암묵적인 디지털 품앗이로 느끼실까 싶어 참고 있는데, 아, 그냥 좋은 건 좋다고 표현할걸. 내가 느낀 감사함을 나누지 않고 독식한 것만 같아서 부끄럽다. 혹시 오늘 이 글을 읽고 계신가요, 저는 당신의 재미있는 글들을 꾸준히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애정하는 음악들을 들고 와서 개인적인 감상을 늘어놓을 뿐이지만, 글로써 짧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나누는 것은 음악을 듣기만 할 때에는 얻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재미다. 그게 다시 나를 적당한 꾸준함으로 이끈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음악을 들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 장황한 만큼 아무런 흐름이 없어서 무언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낮부끄럽지만, 저는 음악을 듣고 있자니 아무런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고 싶어집니다. 하루키가 달리기와 글쓰기를 어떻게 연관지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정도로만 연관짓고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025의 숫자 5를 지워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하다간, 이번이 그렇지 않은 마지막 고민이겠다고 생각하며,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해 피 뉴 이어!
*Some time legends 는 흥미로운 앨범들에 대한 리뷰 모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