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으로의 두드림 / 그물돼지의 착시 / 외계 고양이
<세상의 끝으로의 두드림>
어떤 이유로 취미를 시작하셨나요?
그림이 취미였던 적이 있습니다. 일러스트를 그리는 친구를 따라 시작한 취미였는데, 저는 친구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 친구의 태態를 동경해서 그림을 취미로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그 친구만의 방식으로 각색된, 귀퉁이가 해진 일본 패션잡지 속 모델들의 다양한 포즈들. 찢어져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잉크를 확인하기 위해 그은 몇 획의 곡선들. 처음 그 친구를 본 순간부터 친해질 것이라고 예감했던 것처럼 그 친구의 그림은 첫 장부터 좋았습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일관된 그 친구의 습작들에서 오랜 습관의 흔적이 엿보이면 저는 반짝이는 구슬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신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손으로 직접 만드는 흔적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묻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때로 그 됨됨이를 닮고 싶은 마음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어릴 때에 저는 좋아한다는 말이 부끄러워, 대신에 그 사람의 손글씨를 몰래 필사하곤 했습니다.
그 친구를 자주 만나는 동안에 그림 그리기는 계속 제 취미로 남아 있다가, 그 친구가 멀리 이사해 가끔씩만 보게 되고 나서는 귀신같이 그림 그리기를 멈추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취미의 시작점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뚜렷한 눈빛을 가진 친구가 던지던 농구공, 형이 듣던 재즈와 형이 내려주던 커피, 무색무취의 군생활 중에 불현듯 맡은 누군가의 향수 냄새나, 여자친구의 시선을 드러내는 듯한 아웃핏 같은 것들이요. 어쩌면 글을 쓰는 취미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 시작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어떤 동경도 흔적도 따르지 않아서 가장 오랫동안 저의 취미로 남아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림을 그리던 친구와 틈틈이 만나기는 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와 가끔씩만 보내는 시간의 밀도에 또 다른 동경심을 가지고 있어 저는 취미 삼아 연락을 참는 걸지도 모릅니다.
친구는 닮는다고 하는데, 그 친구가 투영된 취미가 뒷전으로 밀려버리고 나니 왠지 스스로 좋은 것을 닮아가기를 멈춘 것이 아닐까 싶어 아쉽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핀터레스트에 올라온 랜덤한 모델 사진을 그려보다가, 왠지 내가 그리고 있는 소녀가 오래전에 읽은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속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만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아서 제가 떠올리는 소녀가 주인공 소유인지, 주인공의 친구 쇼코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책의 초반에, '파도는 세상의 끝을 두드리는 모습'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납니다. 이 짧은 표현이 기억에 남은 이유는 아마도 '세상의 끝'이 육지의 기준이 아닌 바다의 기준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림 속 여자는 소유의 친구 쇼코겠네요. 쇼코는 바다를 건너 한국에 온 일본인 교류 학생이었으니까요.
아무튼 간, 그런 감상이 들어 괜히 파도 사진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쁜 실력으로 '쇼코' 아래에 그 파도를 그려 넣었습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니 손이 가장 어색해하는 대상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아닌 자연입니다. 그건 어쩌면 그림을 손에서 놓은 시간 동안에 제가 더 많이 쳐다봤던 것이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뜻일지도요.
오늘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시간을 조금 보내려 합니다.
모두들 무병장수하세요.
<그물돼지의 착시>
가끔 물건의 형체가 무언가 다른 것의 형체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카메라를 챙겨 목적 없이 서해안을 달리다간 인적 없는 모래사장을 마주쳤습니다. 삼각형 모양으로 쪼개진 바위 파편들에 발바닥이 찔리지 않도록 어기적거리며 걷다가, 어미돼지와 아기돼지의 사체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곤 우뚝 섰는데, 그것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낡은 그물이었습니다.
한 쌍의 그물돼지 종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듯 드문드문 플라스틱 뼈대가 노출돼 있습니다. 이 가슴 시린 돼지 가족을 축축한 흙바닥과 상봉시키려고 파도가 등을 두드렸을 것이라 생각하니 문득 목덜미깨가 시큰해 저는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의 형체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무언가는 그 정체와 상관없이 그 형체만으로 기분을 오싹해지게 만들고는 합니다. 예컨대, 뭐 잊은 거 없냐는 여자친구의 카톡이나 별일 없냐는 교수님의 연락이 그렇습니다. 무서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밤길에 앙상한 팔다리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고목古木들이 그렇습니다. 피곤한 날에 열병처럼 꾼 악몽들이 그렇습니다.
특히나 그런 악몽들은 미래의 무언가를 암시하려는 듯이 끈끈하고 반투명한 거미줄을 얼굴에 뒤집어씌웁니다. 밝은 대낮에 잠에서 깨더라도 마른 손으로 연거푸 세수를 하기 전까지는 그 무딘 감각을 거둬주지 않습니다.
언젠가 몸살에 시달리던 때, 이사하기 전에 살던 아파트가 꿈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의 저보다 스무 살은 많게 느껴졌고, 저와 나란히 걷던 친구도 마찬가지로 스무 살은 많아 보였으며, 한여름의 뙤약볕이 불에 달군 식칼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늘로 걷고 있었습니다. 야외주차장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노모가 앉아서 공구가방에 든 물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그 노모는 저희 어머니였고, 공구가방 안에는 다양한 잡동사니들에 가격이 이름택으로 붙어 있습니다.
모든 꿈들이 그렇듯이, 그런 꿈에는 한 치의 위화감도 기시감도 없습니다. 꿈에 직접 본 적 있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조잡한 소설만큼 어색한 세계를 익숙한 동네처럼 받아들이고, 존재하지 않는 퍼즐 조각을 직접 조각하듯 없는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그 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마치 수학에서 증명이 필요 없는 참의 명제, 공리(公理)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저는 그런 설정들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친구가 다가갑니다. 저는 따가운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별 수 없이 친구의 등을 따라갑니다. 달궈진 아스팔트 한가운데서 활짝 웃으며 “아들 왔구나”,하고 늙은 어머니가 고개를 들고 저와 눈을 마주쳐 보입니다. 친구는 당신의 인사를 제 대신 받으며, 어머니 앞에 놓인 공구가방 속 잡동사니들을 이리저리 꺼내 보는데, 그것들은 ‘100원’의 이름택이 붙어 몇 개 남지 않은 껌과, ‘500원’의 이름택이 붙어 한쪽 알이 빠진 안경과, 마찬가지로 ‘1,000원’이 붙어 혼자만 남은 쓰레받기 등입니다.
그러다가 친구는 빨간 담뱃갑 하나를 찾아 제게 보여줍니다. 그 담뱃갑이 눈에 익습니다. 어릴 때 몰래 담배를 피워 보고 집에 들어왔다가, 어머니가 제 가방에서 담뱃갑을 발견해 크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꿈의 기억이 아니고 현실의 기억, 제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정확히 동일한 담뱃갑은 아니지만, 정말로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걸 피느냐고, 이런 걸 대체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어머니가 손으로 쥐고 화를 냈던, 그 기억 속의 그 담뱃갑이 늙은 어머니의 낡은 공구가방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공구가방 안에 있는 잡동사니 중에서 저와 관련된 것은 단지 그 담뱃갑 하나뿐입니다.
낡은 담뱃갑 안에는 담배가 몇 개비 남아있지 않았고, 담뱃갑 자체는 손으로 꽉 쥔 듯 구겨져 귀퉁이가 터졌으며, 종이갑 내부의 구석마다 갈색 톱밥들이 이리저리 붙어 있습니다. 그런 쓸모없는 담뱃갑에 이상하게 오만 원이라는 큰 금액이, 면면마다 이름택으로 부적처럼 붙어 있는데, 왜 그것이 오만 원이나 하는지 늙은 어머니는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싱긋 웃습니다.
친구는 이걸 사겠다고 저와 저의 늙은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왜 그런 걸 사느냐고 말리는 저를 무시하고, 어머니 물건 팔아 드려야지,라고 말하며, 친구는 이미 지갑을 꺼내고 있습니다. 친구가 어머니에게 오만 원을 건네자 활짝 웃는 어머니는 그 빳빳하고 노란 지폐를 받아 듭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표정은 지폐를 받자마자 일순 구겨지는데, 어머니의 얼굴은 손으로 구긴 담뱃갑과 같은 질감이 되었고, 왜 어머니의 표정이 구겨지는지 저는 알지 못하나 그제야 늙은 어머니의 뺨에 자글자글하게 진 주름을 봅니다. 담뱃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친구가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가 다시 시원한 그늘로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가 등 뒤에서, “젊은이”, “젊은이 조심히 가라”, 인사를 건넵니다. 아들이라는 말 대신에 ‘젊은이’라는 단어를 어머니가 썼다는 사실이 낯설어 저는 어머니를 돌아보지만 어머니는 저를 마주 보아주지 않습니다.
꿈은 그 지점에서 끝났지만 잠에서 깨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흐른 것 같습니다. 저는 울면서 깼습니다. 얼마나 울었고 있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고, 깨어나기 직전에도 울고 있었던 것 같고, 마치 한참 울고 있던 도중에 깨어난 것만 같습니다. 아니, 저는 무어라 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도 소리를 냈는지는 잘 모르겠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현실에서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꿈들이 그렇듯이 그런 꿈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한 마디의 설명 없이도 저는 모든 일들을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늙은 어머니는 치매가 시작되고 있었고,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그러모아 공구가방에 넣어 두었으며, 그것들이 팔리면 어머니의 팔린 기억은 사라지는 식입니다. 늙은 어머니는 당신 아들에 관해 몹쓰게도 마지막으로 남은, 담뱃갑이라는 기억을 팔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도 사지 않을 오만 원이라는 큰 금액을 붙여 두었는데, 그것을 제 친구가 사버렸고, 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을 팔아버린 어머니는 저를 더 이상 아들이라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그 꿈의 모든 면면에서 저는 점차 슬퍼졌지만, 그 무엇보다도 저는, 담뱃갑이라는 기억을 제가 제 손으로 직접 사지 않았고, 제 친구가 대신 거두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슬퍼 더 크게 울었습니다.
다 울고 나서는 어머니가 차려 주신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잘 잤느냐고 물어서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혀를 끌끌 차며 개꿈이네,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머니는 수학 선생님을 하시느라 기억력에 관해서는 저보다 한참 앞서고 계십니다.
<외계 고양이>
귀엽고 멍청한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인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최근에 ‘펭귄이 외계 생물체일수도 있다'는 무자비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2020년 9월, 금성 상공 48km 중위도 부근에서 포스핀이라는 물질이 발견되었답니다. 포스핀은 인(P) 원자에 수소(H) 원자 세 개가 합성된 물질인데, 마늘 냄새나 썩은 생선 냄새를 내는 화학물입니다. 2021년 9월 13일, 영국 주간 더위크는 금성에서 발견된 이 포스핀이라는 물질이 펭귄의 배설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논문을 인용하며, 이것은 펭귄이 외계인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외계의 생물체인 펭귄이 어느 날 지구로 날아왔지만 남극에 불시착하고, 지금의 펭귄과 같은 형태로 남아 고향에서의 물질을 싸면서 인간을 지배할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겠습니다.
외계펭귄의 침략, 저는 최근에 친구가 공유해 준, 외계 홍어의 침략을 주제로 다룬 <홍어의 역습>이라는 영화가 떠오릅니다. 대충 이주할 행성을 찾아 지구로 온 홍어가 하필 홍어 맛집 욕쟁이 할머니네 장독대에 갇히고, 공연을 위해 찾아온 밴드팀과 마주쳐 기상천외한 전쟁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랍니다(정말입니다).
물론 펭귄의 똥에서 검출된 포스핀은 생물학적이나 환경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 논쟁이 일단락되었기는 했지만, 우주선을 타고 꽥꽥거리며 우주를 활보하는 펭귄을 상상하는 것은 꽤나 재미있습니다. 우주선의 난방 시스템이 고장 났다. 전 펭귄 대원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허들링(huddling)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고는 몇 마리의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모이려다 차례로 넘어집니다.
외계펭귄의 침략은 왜 흥미로운 음모론이 아닌 억지스러운 오해로만 읽히는 걸까요?
이야기에 약간의 이질감을 부여하면 어떨까요, 조금은 위기의식이 느껴질까요?
가령, 눈이 세 개인 고양이를 생각해 봅니다. 시바신의 형상처럼 이마 중앙에 ‘제3의 눈’을 개안한 외계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굉장히 이질적인 고양이가 참치캔 모양의 우주선을 타고 날아왔습니다. 기원전 2400년 경의 일입니다.
당시 우주는 파벌을 나눈 외계 고양이들의 싸움으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몇 개의 항성계가 파괴되는 우주적 전쟁의 결과는 필연적이게도 자기소멸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고양이 군단이 패잔병들과 비상식량(참치캔)을 모아 우주를 떠돌아다니다 외딴 지구의 외딴 한반도에 불시착했는데, 당시 한반도는 아직도 단일의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입니다. 참치캔을 뜯을 힘도 없던 외계 고양이들은 하는 수 없이 인간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지만, 이미 한반도 금수강산에는 곰 종족이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우주여행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외계 고양이들은 지구인 지배권을 걸고 곰 종족과 100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곰의 체중을 받아내기에 굶주린 고양이로는 역부족입니다. 결국 외계 고양이들은 인간 지배의 꿈을 허무하게 잃고 종족경쟁에서 밀려버립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옛날 옛적 하늘(우주)에서 내려온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도록 했다는 단군신화가 더 허무맹랑합니다. 호랑이가 고양잇과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오히려 단군신화의 숨겨진 진실 속에 외계 고양이가 있을 지도요. 외계 고양이를 이긴 곰, 즉 웅녀가 단군을 낳았다는 것까지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가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와전되기 마련이라더니, 지금 길에 돌아다니는 -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세 번째 눈을 꼭 감은 - 고양이들에 연민의 감정이 생깁니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아니, 외계 고양이들이 담배 피우던 시절, 그 무시무시한 위엄을 사람들은 전부 잊어버렸습니다. 실전된 이야기는 아마 어디에서도 이어지지 않겠지요.
루왁 커피에도 포스핀이 검출되는지 확인해 볼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