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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원 Nov 30. 2020

맨날 피곤한 이유를 알아버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머리를 얻어맞았다. 때린 사람은 한병철, 때린 도구는 <피로사회>다. 난 내가 참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험난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남이 아닌 나 자신과 경쟁하고, 나 자신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계발을 소홀히 하지 않고 계속해서 직책과 자격증들을 도장 깨듯 클리어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 이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했다. 아니, 문제가 있다는 인지조차 못 했다. 피로사회를 읽은 후에야 알게 됐다.


아, 난 피로사회의 피해자다!

 


  피로사회의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성과사회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시대마다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는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더 성행하고 있다. 자기를 착취하는 것은 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뤄진다.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우리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규율 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의 부정성이다. 그러나 성과사회는 다르다. 무한정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이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아래,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학대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스스로 가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퍼지며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바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다는  자체가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나처럼. 이러한 긍정성의 폭력은 우울증을 낳는다.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 근대적 인간의 좌절이 낳은 이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서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인간은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그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상태에 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나는 내가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바로 나. 내가 계속해서 하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실체가 있는 것인가? 나는 내가 원해서 한 일이라고 믿었던 여러 일들은 진정 내가 원해서 한 일이 맞는가? 나는 주체적인가. 내가 하는 일들은 무력한가.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긍정성의 시대에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는 모든 행동과 결과물들은 성과사회의 폐해인가. 너무 어렵다. 이 책이 자꾸만 내가 살아온 삶을 반박한다



뭐야...ㅠㅅㅠ



  흥미로운 대목은 곳곳에 있었다. ‘후기 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중략)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정말 공감이 됐다. ‘긍정의 세계속에서 자폐적 성과 기계로 기능하는 와중에도 자아는 팽팽하게  차서 자기 개성을 드러내기를 주저 않는.


  ‘우울 사회라는 챕터에서도 세네트의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발화된다. 자아 속으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데, 이는 자아가 결코 뭔가 새로운, ‘다른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것은 삼켜지고 자아는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있을 때까지 변형된다. 하지만 이로써 타자는 무의미해지고 만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마주치는 모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세네트에 의하면 나는 나르시시스트다. 책을 읽든 경험을 하든 그저 내가 아는 세계 안에서만 깨달음을 얻는다 . 다시 말해서 나의 자아의 한계 안에서만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데미안에서 말하는  깨고 나왔지만 여전히 알에 갇혀있는. 그런 느낌.





  내가 해왔던 고민에 대해 답을 얻은 대목도 있었다.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중심) 도달하기 위한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 된다. 설적이게도 활동 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써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져있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 고르는 책들이 하나 같이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닌 인문학인 이유는 바로 내가 성과사회의 피해자라는 반증 아닐까 싶더라. 요즘 그렇다. 또래 친구들보다 부지런히 스펙을 쌓아, 남들보다 일찍 회사에 들어왔다.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아주 가끔.


  모두들 그런다. 너는 좀 쉬어야 한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예전의 나를 깨부수고 또 다른 성과들을 얻어내고 싶다. 지금 나는, 잠깐의 공백을 참지 못해 글을 썼다. 나는 피로사회의 피해자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으로 대변되는 플랫폼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소통의 플랫폼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 만을 찍어낼 뿐이다. 그 속에 갇힌 사람들. 긍정적이다. 슬픔과 비관은 없다. 성공한 사례를 찾기가 쉬워졌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득 안고서 무엇이든 도전하는 사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 아우성치는 사회. 우리 모두는 피로사회의 피해자다.




  피로사회를 처음 읽은 게 벌써 재작년입니다. 이후 저는 한병철이라는 철학자에 푹 빠졌어요! 모든 책을, 그것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비슷한 논조에서 각기 다른 현상을 다르게 분석하는 한병철 만의 인사이트에 매번 감탄을 하곤 해요. 대단한 사람, 대단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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