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서울역 벽에 붙어 있던 종이 한 장
고시 합격 소식 없이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무렵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군대였다.
어느 날
군 입영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았다.
고시 공부를 계속하려면
군 문제부터 정리해야 했다.
면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복무 기간이 짧은 방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신체검사 날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내 몸을 스스로 괴롭히는
참으로 어설픈 노력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현역 입영 대상.
결과지를 받아 들고
멍한 마음으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때
벽에 붙어 있던 작은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카투사 모집 공고.
시험 날짜와 시험 과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잠시 그 종이를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군대는 가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곳으로 가 보자.
영어도 배우고
미국 문화도 접해 보고.
그렇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카투사 시험을 준비했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주변에서 기대를 받던 사람이
군대에 간다고 하면
어쩐지 배신감을 줄 것 같았다.
어쩌면
고시 실패로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저히 비밀로 했다.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입대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카투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곳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시라는 길이
거의 유일한 인생의 길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미군들,
그리고 카투사 동료들.
그들의 생각도
삶의 방식도
내가 알던 세계와는 달랐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방법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내 생각의 틀이
딱딱하게 굳지 않고
조금씩 유연해지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만약 내가
젊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해
곧바로 관직에 나갔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좁은 생각 속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삶에는
절대적인 바름과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경험들이 있을 뿐이다.
어떤 환경이든
잘 받아들이고
잘 발효시키면
그 모든 시간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다.
돌아보면
서울역 벽에 붙어 있던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내 인생의 생각을
조금 더 넓게 열어 준
하나의 문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