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시간들 (11)

11.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by 한칸생각

군 제대 날이 왔다.

막상 그날이 오자
생각이 많아졌다.

군대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며
웃고 떠들다 보니
잠시 내 처지가 무엇인지 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부대를 나와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복학까지 5개월.

4학년 2학기 복학을 하려면
꽤 애매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서울에 올라간다고 해도
기숙사에 들어갈 상황은 아니었다.

어디서 지내야 할까.

그때
서울에 있던 고향 친구 하나가 말했다.

“야, 그냥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있어.”

그 친구는
S대 공대를 졸업하고
Y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친구는 쿨하게 말했다.

“냉장고에 우유랑 빵 같은 거 챙겨 놓을 테니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

말은 참 고마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편하지 않았다.

우유와 빵을 먹을 때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부탁했다.

“혹시 과외 자리 하나 알아봐 줄 수 있어?”

복학 전까지
나도 돈을 조금 벌어 보고 싶었다.

며칠 뒤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야… 강남 어머니들은
실력보다 S대생을 원하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살짝 내려앉았다.

실력이 아니라
간판이 기준이 되는 세상.

그때 처음
묘한 현실의 벽을 느꼈다.

그 무렵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다시 고시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 할까.

일단 복학 등록을 하러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 게시판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했다.

그해 첫 추천장 하나.
금융기관이었다.

이름은 익숙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급여 수준이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편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일단 취업해서 돈 좀 모으고
다시 고시 공부하면 되지 않겠냐.”

그래서 나는
아직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했다.

그 결과
조금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주로 회사,
가끔은 학교.

4학년 2학기 학생이면서
동시에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조합이다.

하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아이러니는
그다음에 있었다.

나는 아직 졸업 전이라
학교에서 받던 혜택이 그대로 유지됐다.

장학 조건에 따라
등록금 면제,
매달 생활비 지원.

그리고 여기에
회사 월급까지 더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미안했다.

학교는
나를 고시 합격생으로 키워
대학의 위상을 높이길 기대하며
많은 지원을 해 주었는데

군대 갔다 온 뒤
나는 느닷없이 취업을 해 버렸다.

어찌 보면
학교 입장에서는
“투자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기도 하지만
어떤 길은
살다 보니 시작되기도 한다.

내 직업 인생도
그렇게 시작됐다.

거창한 결심도 없이.

그저
살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