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묵기가 되기로 했다
드디어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채권을 회수하는 부서였다.
회사 안에서는
그다지 인기 있는 부서는 아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은근히 피하는 부서였고,
그래서인지 나이가 많은 직원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회사는
부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번에 들어온 신입 직원들을
‘활력 제고’라는 이름으로
대거 배치한 것 같았다.
나는 학생 때 하던 방식 그대로
일을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맡은 채권 하나하나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에 맞는 방법으로 업무를 진행했다.
그 결과
본부장 평가에서
매달 상위권에 이름이 올랐다.
본부장님은
나를 예뻐해 주셨고,
채권 회수 업무의
좋은 모델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부서 분위기도
조금씩 살아나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내 자리 뒤쪽에 앉아 있던
팀장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저 친구는 업무를 독하게 해.”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채권회수 업무 묵기야.”
순간
깜짝 놀랐다.
묵기.
사투리로
어떤 행동이나 생활이
몸에 배어
체질처럼 된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귀에는
묘하게 들렸다.
열정적인 직원이 아니라
독하게 일하는 사람.
그리고
채권 회수라는
특정 업무에
체질화된 사람.
칭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말이었다.
나는
못 들은 척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결심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모든 업무의 묵기가 되어 보자.
채권 회수만이 아니라
어떤 일이 주어져도
그 일에 체질화된 사람처럼
일해 보자고.
그리고 또 하나
마음속으로 말했다.
채권 회수 업무는
내 직장 생활에서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결심은
현실이 되었다.
내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에서
채권 회수 업무는
그 부서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신용평가,
심사,
감사,
국제 업무,
CSR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그리고 그곳마다
또 다른 ‘묵기’가 되었다.
승진에서도
늘 묵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우연히 들었던
팀장님들의 대화는
내 직장 생활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의 팀장님들께
감사하다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일지도 모른다.
같은 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향이 된다.
그날
나는
상처 대신
방향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