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자 서평|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역정(歷程)>
한 사람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하기는 쉽지 않다. 오래 전 리영희 선생의 <역정(歷程)>을 읽고 떨리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책은 '나의 청년시절'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전적 에세이다. (내가 알기로는) 수많은 저서 가운데 직접 자신의 삶을 풀어놓은 유일한 책이다.
책 내용의 자세한 대목들은 기억이 흐려졌지만, 당시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자신을 객체화해서 담담하게 써내려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사실과 진실의 두 축을 평생 글쓰기의 지렛대로 삼은 리영희 선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종 후배 기자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언론인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엔가 교보에 문의했더니 절판돼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그런데 리영희 선생이 타계하자, 이 책은 다시금 부활했다. 창비에서 더 찍기로 한 모양이다. 어쨌든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준 선물같다.
<역정>은 1929년부터 1963년까지의 행적만 담고 있다. 이 책의 부제처럼 30대 중반인 리영희에서 기록이 멈춘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은 2부 중년시절, 3부 노년시절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는 꿈꿀 수 없는 바람이 됐다. 청년시절이라도 기록을 남겨준 리영희 선생께 감사드린다.
(<역정-나의 청년시절> 리영희 / 창작과비평사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