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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Jun 21. 2023

풀무학교에 쏟은 불꽃 열정 '밝맑 이찬갑'

1994년 <우리교육> '한국교육인물열전 13'


풀무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특수' 학교의 하나이다. 특수교육을 하는 학교여서가 아니라 교육의 내용과 지향이 '특수'하기 때문이다. 농촌공동체 건설이라는 이상향을 꿈꾸며 세워진 학교, 밝맑 이찬갑(1904~1974) 선생은 그러한 '풀무'의 이념과 이상향을 실천하고 가르친 사람이다. 그가 '풀무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풀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밝맑 이찬갑 선생.


"이 학교는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된다는 세상에 정신뿐이어야 하고 정신이어야 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간판을 얻고 출세를 해야 한다는 세상에 그런 것처럼 우습고 어리석은 놀음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참된 깨우침을 불러 일으키는 부르짖음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신적인 깨우침, 깊은 의미에서의 새로운 세계 발견의 부르짖음이 아니면 아니될 것입니다. 참말 참된 자리에서의 깨우침, 불 붙는 이상에서의 부르짖음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1958년 4월 23일 충남 홍성 풀무고등공민학교(풀무학교) 제1회 입학식에서 밝맑 이찬갑(李贊甲) 선생은 "기존의 도시·물질·출세 교육에서 벗어나 농촌·정신·민중 교육으로 이 민족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 54세. 풀무학교는 초가 지붕의 허름한 교사(校舍)에 선생 2명, 학생 18명으로 단촐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권력과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줏대, 교장과 졸업장이 없는 무두무미(無頭無尾)의 원칙만은 지금까지도 학생과 교사들 가슴에 끊임없이 '풀무질' 되고 있다.


밝맑이 풀무학교에 몸담은 기간은 3년, 그것도 오십 중반의 일이었다. 그런 그를 풀무학교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밝맑과 함께 풀무학교를 세운 주옥로 선생(75)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그의 발자취 때문"이라고 한다. 미지근한 것을 싫어했던 밝맑, 그래서 모든 열정을 풀무에 쏟아 부은 그의 삶에 그 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살아있는 교육, 풀무와 같은 학교를 갈망했다. 일본의 강점으로 가위눌린 조선의 현실에서도 청년 밝맑은 참된 교육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조선이 돈이 많으면 살까. 모두 건전하면 살까. 지식이 많으면 살까. 아니다. 모두 아니다. 깨어나는 것이 문제다. 움이 돋는 것이 문제다. 이 때는 자다가 깰 때이다. 그렇다. 그래서 이것이다."(1934년)


남강에게 대든 유일한 젊은이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 초상화. ⓒ 독립기념관

밝맑 이찬갑은 1904년 5월 13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이윤영 씨와 승달현 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종증손(從曾孫)인 밝맑은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를 중퇴했다.


오산중학교 시절 밝맑은 야구선수로 인기가 높았다. 스스로 국내 최우수 선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왜 오산도, 야구도 그만 두었는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다. 이름보다 '밝맑'이라는 아호(雅號)를 더 아끼고 즐겨 쓴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밝았습니다, 맑았습니다에서 따온 밝맑이라는 호만 봐도 그가 우리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19세 되던 해(1923년) 김경의 씨와 결혼한 밝맑은 24세(1928년) 때 고향을 떠나 서울 피어선 고등성경학원에서 몇 개월 동안 수학한 뒤, 같은 해 9월 돌연 일본으로 떠난다. 그는 1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동경시 성노원 상하도 빈민굴, 천엽현 농전촌, 두기촌 등을 순회한다.


밝맑의 일본행은 일제치하 지식인들의 일반적 유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학교에서의 배움보다는 몸으로 부대끼면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굳이 빈민굴 생활을 자처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평생 지기였던 송두용 선생(작고·<성서신애> 주필)은 "밝맑은 농촌교육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가 몇 차례 일본에 다녀 온 것도, 그 후 과수원을 경영했던 것도 다 농촌 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밝맑이 일본에 머물 때 한번은 작은 아버지(이창건)가 직접 찾아왔다. 빈민굴에서 초라한 차림으로 생활하는 조카를 보고 그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오산에 가면 무엇이든 큰 일을 할 수 있으니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밝맑은 "그 썩은 오산에는 가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밝맑은 오산학교가 초창기와는 달리 고보로 승격된 뒤 교사들의 월급도 오르고, 차츰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남강의 종증손이고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던 밝맑이지만, 원칙에 벗어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싸웠다. 남강이 만년에 술과 담배에 손을 댈 때 그에게 대들었던 유일한 사람이 밝맑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친지들의 권유로 오산 양계조합장, 소비조합 전무이사 일을 보기도 했으며 '오산농원'이라는 과수원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30세 전후의 일이다.


34세(1938년) 되던 해, 그는 다시 일본 동경시 무장야학원, 옥주학원 등을 돌아보고 왔다. 이 때 밝맑의 가슴에 화인(火印)을 찍어 놓은 사람이 덴마크 국민고등교육의 창시자인 그룬트비(Grundtvig)였다. 밝맑은 비록 책을 통해 그를 접했지만, 평생 농촌과 교육문제에 헌신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들이 아버지에게 자주 듣던 얘기 가운데 하나가 그룬트비의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서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평소 국사와 국어에 큰 관심을 가지셨고, 저와 동생이 국사와 국어를 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권고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밝맑 이찬갑 선생의 장남인 이기백 교수. ⓒ 연합뉴스

밝맑의 장남이자 <한국사신론>의 저자인 이기백 교수(70·한림대)의 말이다. 삼남 이기문 교수는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룬트비에게 영향 받아


<성서조선>의 주필이었던 김교신 선생과 친분이 있었던 밝맑은 김교신 주필의 필화사건(<조와(弔蛙)라는 글)에 함께 연루돼 38세(1942년) 때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밝맑은 가족과 함께 월남한다. 1948년의 일이다.


월남 후 밝맑은 잠시 제본소를 운영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밝맑을 만났던 박승협 씨(전 한국산업은행 조사부장)는 "이 선생님이 해방 후 서울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 때 저에게 종업원들의 참여의식을 심어주려 한다며 스스로 만든 노동계약서 초안을 보여주신 일이 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1945년 해방 직후 그는 농촌 교육에 대한 이상을 담은 <다시 새 날이 그리워>라는 글을 정리하며 본격적인 교육 활동을 결심한다.


"헤쳐감의 표징인 부지런히 일하며 / 찾아감의 표징인 부지런히 공부함 / 이로 우리 삶의 터전을 삼음 // 해뜰 때 문을 열고 해질 때 집에 들며 / 언제든 참과 옳음 무어든 밝고 맑게 / 이로 우리 삶의 규범을 삼음 // 이 수난의 상징인 조선에 뛰어 들며 / 또 조선의 상징인 농촌을 둘러 메임 / 이로 우리 삶의 의무를 삼음 // 참됨의 새 인간에 이 겨레가 깨나며 / 영원의 새 나라에 이 겨레가 살아감 / 이로 우리 삶의 이상을 삼음." (표지 글 '새 날의 표어')


밝맑이 교육의 이상을 펴고자 준비했던 기간을 굳이 나눈다면 오산과 일본에서의 경험이 제 1기, 해방 후부터 풀무학교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까지가 제 2기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교육에 대한 밝맑의 구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새 날을 그리워>를 보면 당시 그가 고민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연의 오아시스인 농촌이 없이 교육(인간의 이상)의 싹이 트어날 수도 없으려니와 이상의 발화점이랄 교육이 없이 농촌(인간의 이상)의 꽃이 피어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이 땅의 교육상태인 현재의 이 감시와 다툼의 밑에서 우승열패·생존경쟁·입신양명·감투바람만이 조장되어 아부·기만·살벌·암흑이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길러냄의 연구와 번갯불의 토의에서 튀어나고 떠메고 감의 사명감에서 빛나는 개성, 이상사회가 전개되는 교육"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수십년 동안 농촌 교육을 갈망해온 밝맑은 드디어 교사로서의 경험을 하게 된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내려와 1951년(47세) 부산 대연국교에서 3년 동안 교편을 잡고, 그 후 경기도 여주 대신중학과 인천 해성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천 해성고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한석만 씨(전 휘문중고교 교사)는 "밝맑 선생은 항상 민족의 자아의식을 강조했다. 당시 50세 전후였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옆 교실에까지 들릴 정도로 힘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교사들은 그의 열강을 격찬하고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밝맑이지만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도 <한글>지를 계속 구독했고, 이병도 선생의 <국사대관>과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즐겨 읽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평소 "민족과 신앙, 이 두가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신앙을 버리겠노라"고 말할 정도로 민족을 소중히 여겼다. 밝맑의 민족관은 철저히 독립과 자존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날 해성고에서 특강을 하며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늘 기본정신을 바로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부터 바로 되려면 그 기초와 시발이 올바른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 예로 미군이 먹고 버린 깡통을 펴서 조각조각 이은 함석으로 차양을 한 것은 고안도 아니요 일도 아니다. 제 정신을 잃은 답답한 일이다."


유리조각과 소똥 줍는 선생님


이찬갑과 주옥로는 1958년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시작했다. 사진은 1958년 풀무학교 모습. ⓒ 그물코 출판사


1960년 풀무학교를 이끌던 이들. 앞줄 왼쪽부터 이찬갑과 주옥로이고 뒷줄 왼쪽이 홍순명이다. ⓒ 그물코 출판사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밝맑의 머리 속에는 항상 농촌에 내려가서 교육다운 교육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중 성서모임을 통해 알게 된 주옥로 선생과 58년에 풀무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찬갑 선생은 이미 강원도에서 풀무와 같은 학교를 만들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 선생이 55년에 제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함께 학교를 만들자는 내용이었지요. 그 제안은 3년이 지난 뒤에야 빛을 발했습니다."


학교 터는 주옥로 선생이 마련하고, 이름은 풀무골이라는 지명에서 따왔다.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고, 수업 준비로 다음 날 새벽에나 잠이 드는 3년 간의 풀무학교 생활이 드디어 시작됐다. 다부진 눈매에 유난히 쨍쨍한 목소리를 가진 밝맑은 평상시 한복에 까만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옆구리엔 책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밝고 맑은 생활을 철칙으로 삼았던 밝맑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학생들의 작은 잘못도 결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 탓에 종종 주위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독선적이다, 교만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지인들은 "부정직을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낳은 오해"일 뿐이라고 말한다. 주위 사람들은 밝맑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의 불같은 성격을 오히려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주옥로 선생은 풀무학교 초기에 아이들에게 너무 엄격했던 밝맑과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밝맑은 아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밝맑은 언젠가 주 선생에게 "내가 죽게 되면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말고 뒷동산에 세 길 깊이로 파서 선 채로 묻고 나무를 심어 평토장을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또 "나이가 들어 나나 주 선생이 교사 노릇을 못하게 되면 나는 청소부, 당신은 문지기나 하자"고 말하곤 했다.


밝맑의 교육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역사책을 읽어주지 않고 역사를 말해주는 선생이었고, 학생들을 야단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는 이였다. 학생과 함께 길을 걸을 때도 길가에 있는 유리조각과 사금파리를 주머니에 담는 선생으로 유명했다.


"길가에 유리조각이 널려 있는데, 그냥 두면 부모님들이 맨발로 일하시다 다치기 쉽지. 그런데도 왜 자꾸 버릴까. 또 왜 남이 버린 것을 줍는 사람이 없을까. 모두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 길가에 있는 소똥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밭에다 던져두면 거름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우선 자각을 해야 해. 자각을 않고 살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어. 글씨 한 자 쓰고 말 한 마디할 때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과 정성, 이것이다. 알겠니."


"일만 하면 짐승, 생각만 하면 도깨비"


1959년 전국 무교회주의 성서조선 모임을 가진 후 풀무학교 뒷산에서 찍은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찬갑, 둘째 줄 가운데 수염 기른 이가 함석헌. ⓒ 그물코 출판사
이찬갑이 남긴 7권의 스크랩(오른쪽). 왼쪽은 오산학교 신축기사를 다룬 1939년 10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스크랩이다. ⓒ 궁리출판


"애국자의 소굴이었던 오산학교가 아무런 특색도 없는 간판뿐인 학교가 돼 간다"며 개탄했던 밝맑이었지만, 오산학교에서의 배움은 그의 교육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밝맑은 2대 교장이었던 유영모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았다.


밝맑이 평상시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일만 하면 짐승, 생각만 하면 도깨비. 우리나라엔 도깨비와 짐승은 많아도 일하며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도 오산학교 시절 유영모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정성과 정신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서슴지 말고 그 날로 교문을 닫아 버릴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밝맑. 그는 "수천년된 농업국가이면서 식량 하나 자급할 수 없는 거지의 나라임을 똑똑히 알아 농촌의 일을 우리가 맡자. 수난의 상징인 농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김영천 씨(대신학교 졸업)는 "실습 현장에 나와 일에 익숙치 못한 선생님이 뙤약볕 아래 옷을 흠뻑 땀으로 적시면서 농장 일을 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며 밝맑 선생과의 만남을 떠올린다.


스스로 '외톨이'라고 말했던 밝맑은 "사람은 삶의 귀함도 크지만, 뚜껑을 덮는 죽음의 의미가 더욱 크다"며 당시 학생들이 선뜻 그 의미를 깨닫기 힘든 이야기도 하곤 했다. 혼자 고뇌하고 앞서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전 생애는 짙은 안개와 같은 적막과 고독감이 서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밝맑은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지인들은 밝맑에게서 왠지 모를 외로움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이기백 교수는 "아버지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분이셨습니다.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외톨이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그건 뜻을 알아주고 함께 하는 동지들이 적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의로운 일을 하셨다는 점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은 분이셨습니다"라고 말한다.


밝맑은 월남 후 소규모 사업도 하고 교사 생활도 했지만 그것이 7남매 키우는데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김경의 여사(89)가 동대문시장에서 의류 소매를 하면서 7남매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 넉넉한 경제 형편이 아닌데도 그가 교육에 전념하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던 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왔던 김 여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능력은 차이가 있지만 인격은 공통


풀무농업학교 학생들이 갓골작은가게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 부근을 지나던 홍순명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자리에 앉게 한 뒤 정겹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한겨레
풀무학교와 밝맑도서관. ⓒ 홍성군청 블로그


밝맑은 풀무학교에서 4·19를 맞았다. 이승만 독재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김주열의 죽음에 분노하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에 찬사를 보냈다. 한번은 함께 근무하던 교사가 그에게 "선생님, 늘 불만과 울분을 터뜨리시더니 이제 얼마나 기쁘십니까"라고 묻자 밝맑은 어린아이처럼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순수, 정직, 성실을 생명으로 삼고 허위, 허식을 가장 미워했던 밝맑'(유희세·전 고대 교수)은 제1회 졸업식을 2개월 앞두고 연탄가스를 맡아 더이상 풀무에 머물 수 없게 된다. 풀무학교 사택에서 생활하던 밝맑은 추운 방에 온기를 돌게 하려고 꺼져가는 연탄불을 방안에 들여 놓은 채 잠이 들고 만 것이다. 60년 12월 17일, 56세 때였다. 그 뒤 그는 서울 집으로 돌아가 14년 동안 길고 긴 투병 생활을 한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거동도 불편해진 밝맑은 투병 중에도 가끔 "풀무학교에 가야 한다"며 짐을 싸곤 했다. 제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이런 행동을 거듭했다.


61년 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밝맑은 투병 중에 풀무학교를 방문했다. 그러나 밝맑은 이전처럼 굵은 안경테 너머로 학생들을 날카롭게 주시하는, 그날 배운 것은 그 다음날에 꼭 물어보고는 0점을 맞으면 꼭 매를 드는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었다. 수척한 얼굴에 불편한 걸음걸이의 평범한 환자였다. 호랑이 선생님의 방문에 가슴 졸이던 학생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전처럼 쇳소리 나는 큰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훈화시간 때면 들려주곤 했던 육당·춘원을 비판하는 '육당·춘원의 밤' 원고도, 이승만 독재에 대한 개탄도 들을 수 없었다. 물론 부패한 사회현실을 개탄하며 통곡하던 힘있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이번영·풀무학교 졸업)


마지막 날 학생들 앞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칠판에 '풀무의 머슴애와 계집애들아, 야망을 가져라(Boys and girls, be ambitious)'라고 쓴 뒤 잦아드는 목소리로 한 번 읽어주고는 서울로 떠났다. 그것이 풀무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평소 "능력은 차이가 있지만 인격은 공통"이라고 말했던 밝맑. 그는 74년 6월 16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송두용 선생은 "이찬갑 형은 참으로 이찬갑다운, 아니 이찬갑이 아니고는 감당할 자가 없는 그런 높고 귀한 일생"이었다고 평가한다.


밝맑이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풀무학교에서는 '밝았습니다', '맑았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는다. 마치 밝맑을 가슴 속에만 묻어두지 않으려는 듯. 그리고 그들은 다시 가슴 한 켠에 풀무의 정신을 새겨 놓는다.


"간다 간다 / 배우러 간다 // 필기 안 해도 / 암기 안 해도 / 가르쳐 주고 / 배울 수 있는 / 그런 곳으로 / 나는 간다 // 어제는 무우밭을 맸다 / 그래. / 한 평생 흙과 함께 살아야지 / 오늘은 국화향 속에 / 어느새 우리는 부자가 된다 // 그래 맞다 / 거리의 누런 들판에게서 / 부자는 나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 편안한 저녁 노을 향해 / 무거운 부자되어 나는 / 간다 간다 / 나누러 간다." (86년 10월, 2학년 김유진의 시 '함께')   



※ 이 글은 제가 1994년 <우리교육> 기자로 활동하면서 썼던, 한국교육인물열전13 '풀무학교에 쏟은 불꽃 열정 밝맑 이찬갑'이라는 기사 전문입니다. 관련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았고, 출처를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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