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기가 만난 사람
이두호의 만화는 있었지만 만화가 이두호는 없었다.
기자는 만화 평론가의 입장에서 작품론을 쓰려고 그를 만나려 했던 게 아니라 우리 만화계의 중견인 이두호를 인물로서 조명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의 만화만 보일 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사전 정보가 취재의 반(半)이라는 인물 기사를 쓰는 이로서는 매우 난감한 일이었다.
그나마 작가로서의 이두호를 조명해 놓은 게 손상익씨(만화평론가)의 <만화세상이 오고 있다>(92)와 최근 만화비평가협회에서 엮은 <우리만화 가까이 보기>(95)에 수십 명의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간략히 거론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철저하게 작품으로만 말하는 작가들이 만화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 작품의 질과는 무관하게.
<바지저고리>의 작가 이두호와의 첫 만남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스포츠조선>에 5년째 연재하고 있는 역사만화 <임꺽정>의 1부(3권)가 최근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왔다. 역시 <임꺽정>도 이두호의 만화였다. 방학기나 고우영의 <임꺽정>과는 다른.
그의 만화에는 어느 때부턴가 각주(脚註)가 붙기 시작했다.
"부사리 찜쪄 먹을 놈"(부사리: 대가리로 잘 받는 버릇이 있는 소), "이 늘품성 없는 녀석아"(늘품성: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성), "겉볼안이란 말이 순 엉터리네요"(겉볼안: 겉을 보면 속을 안 봐도 알 수 있다는 말), "이 나이에 이르도록 외로움을 삭일 깜냥은 익혔느니라"(깜냥: 일을 가늠해보아 해낼만한 능력).
그의 만화에 본격적으로 각주가 붙기 시작한 것은 85년 <스포츠동아>에 <째마리>를 연재하면서부터. "기자들조차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인데"라는 편집자의 압력(?)과 "만화가 재미있긴 한데 간혹 모르는 말이 튀어나온다"는 독자들의 불만에 밀려 '각주가 있는 만화'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 만화계에선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상업성을 최고로 삼는 스포츠신문의 연재만화에 각주가.
"각주를 다니까 두 가지 반응이 나오더군요. 모르던 단어의 뜻을 명확히 아니까 더 재미있더라, 한편에선 만화가 건방지게 무슨 각주냐."
그가 <째마리>를 연재하면서 초반에 각주를 달지 않았던 것은 "답답하면 자기들이 사전을 찾아보겠지" 하는 심보에서였는데, 곰곰 따져보니 "만화를, 그것도 신문 연재 만화를 사전 찾아가며 보는 사람이 비정상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 편집자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째마리'는 뭔가.
"<째마리>는 제목부터 정하고 그림을 나중에 그린 작품입니다. 언젠가 국어사전을 뒤적이는데 째마리란 말이 눈에 확 띄더라구요. 그래서 이거다 싶었지요."
국어사전에 나온 째마리는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 가장 못된 찌꺼기'라는 뜻이다.
이두호의 이러한 면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만화가답지 않은 '건방'으로 비쳐졌다. 건방진 작가 이두호. 그러나 이두호는 그러한 '건방짐'을 결코 고치지 않고 수십년째 밀고 나가고 있다. 연하이지만 맘이 통하는 지기인 이희재씨(44·만화가)는 그런 이두호의 건방짐을 매우 귀히 여긴다. 이두호와 같은 건방진 만화가가 적었다는 걸 "우리 만화계의 불행"으로까지 보고 있다.
<매주만화>에 김주영 원작의 <객주>(88)를 연재할 때의 일이다. 발길질 하는 장면에서 "거드모리로 내질렀다"는 표현을 썼다. 정작 책이 나오고 보니 '거드모리'가 '갑자기'로 둔갑해 있었다. '거드모리'는 '주저없이' '마구'라는 뜻의 말로 국어대백과사전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김주영의 <객주>에는 나와 있는 우리말이었던 것이다. '주저없이'와 '갑자기'는 엄연히 뜻의 차이가 있는 말인데. 그는 편집자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런 면에서는 리영희 한양대 교수와 닮았다. "글을 쓸 때 그 내용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하나다. 글 쓰는 이는 이를 정확히 따져서 제대로 된 표현을 써야 한다"는. 그래서 리영희 교수는 탈고한 후에도, 자다가도 적합한 단어(표현)가 생각나면 일어나 고치거나 메모를 하고, 이두호는 국어사전을 늘 옆에 끼고 산다.
이두호는 만화를 하기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내심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다. 그가 아직도 버리지 못한 꿈이 있다면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는' 회화를 하고 싶다는 것.
그렇다고 그가 만화 작업을 낮춰 보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두호는 만화를 회화보다 한 급 낮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화라고 하면 '불량'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성립되던 시절의 만화가였고, 아직도 그러한 인식이 없어지지 않은 시기의 만화가인 그로서는 말이다.
이희재씨는 "만화가에겐 5월이 높고 푸른 어린이달이 아니라 악몽이다. 여기 저기서 불량이란 딱지가 붙고 심지어 화형식까지 치러 5월이면 밖에 나가기가 겁난다"고 말한다. 이는 모든 만화가가 겪었고 지금도 겪는 일이고, 이두호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늘져 있던 이전 시대의 만화가는 불쌍한 존재였다.
맘대로 그리고 욕이나 먹으면 맘이나 편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그 당시 만화는 작가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에 따라 완성된 창작품이 아니었다. 아닐 수밖에 없었다. 왜곡된 대본소 구조에서 살아나려면 손이 가자는 대로 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배후에는 편집자가 있었고, 편집자의 배후에는 시장의 논리가 있었다. 결국 만화가가 생존하려면 그러한 구조를 안아야만 했다. 아니면 포기하던가. 그래서 재능은 있지만 참을성(?)은 없는 만화가는 이 판을 떠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두호의 얼굴에는 알게 모르게 그늘이 진다. 그리고 서글픔이 묻어난다. 그도 한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것 저것을 그리는 '기능공' 같은 시절이 있었다. 초기에 미국 만화와 일본 만화를 번안하는 일도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던 작품도 있었다. 그는 "만화가 나에게 자존심을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홍대 서양화과를 다녔다. 2학년 때 자퇴를 했기에 졸업장은 없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활고 때문에 대학시절 때 만화 아르바이트를 했다. 구두닦기도 했고, 이젤 박스에 밀감을 넣어 동숭동 다방을 돌아다니며 팔기도 했다. "눈에 비는 것은 먹을 것밖에 없었다"는 시절,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찌그러진 밥그릇, 명태 등 먹을 것과 관련된 것만 그렸다"는 그 시절, "10원 내고 고구마 두 개를 사 먹고는 나머지 허기는 물배로 채웠다"는 시절이었다.
그 즈음 만났던 사람, 당시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녔고 그보다 서너 살 많았던,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이원재씨를 만났다. 이원재씨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6·3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알았던 지기 강신호씨(목회자)를 통해서 알게 된 이원재씨는 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두호는 "세월에, 그리고 생활에 밀려 되돌아볼 틈이 없었던 나에게 나만이 아닌 세상을 보게 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고, 그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군대 제대 후 그는 <도전자>의 작가 박기정 선생(당시 만화가협회장)의 문하에서 1년 간 있었다. 지금도 그는 박기정 선생을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그는 스승다운 스승을 모실 수 있다는 게 다행이며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69년 <소년중앙>이 창간되면서부터 그는 줄곧 그 잡지와 연을 맺었다. '까목이'가 주인공인 <폭풍의 그라운드>(73), <바람처럼 번개처럼>(78), <개똥벌레 훈장님>(87), <산 넘고 물 건너>(91) 등 20년이 넘게 다수의 작품을 <소년중앙>에 연재했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 먹었던" 시기, 생계 수단으로 만화를 그리던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린 지 10년 만인 79년 즈음이었다. 평생의 작업을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만화냐, 회화냐'. 회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생계 대책이 막막했다. 적어도 '돈에 먹히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결국 만화를 택했는데, 또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만화냐, 삽화냐'. 아무래도 삽화가 회화쪽에 가까워 내심 끌렸고, 수입도 괜찮았지만 거래처를 확보하는 "비즈니스에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진짜로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맘 먹은 그는 이제 장르를 고민했다. 이제까지는 아동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에게 굳이 "왜 역사만화를 택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아도 됐다. 그가 지금까지 줄곧 '바지저고리' 만화만 그려왔고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수북하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조차 대답할 수 없는 답을 그 만화들이 답해줄 수도 있겠고.
이두호의 작업실, 그의 작업대, 그가 작품을 그리다 고개를 들면 안 보고 싶어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넓은 캔버스가 벽처럼 놓여 있다. 그 캔버스에는 3등분된 망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위에서 내리치려고 하는 장면, 가운데에 멈춰선 장면, 아래까지 내려쳐진 장면. 어느 손이 망치를 쥐고 내려치는 연속 장면의 그림이다. 그가 만화를 그리기로, 역사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기분이 울적할 때 보면 흡사 "내 회화 인생은 끝났다"고 선고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7, 8년 전쯤 그는 홍대 입학동기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하도 모임에 안 나오니까 친구들이 강권하다시피 해서 나간 것이다. 회화를 하는 친구들이 '만화가'인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는 그 분위기를 "말로 못한다"고만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마치 "뽕짝을 부르는 성악가를 보는 듯한" 친구들의 눈초리. 1차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2차, 3차에 이르자 한 친구가 "너 여길 뭣하러 왔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생맥주잔을 그냥 놓았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니가 보기엔 내가 창녀같지? 내가 보기엔 돈에 먹히는 회화가 더 더럽다"고.
그 때 그 망치 그림이 집에 걸려 있었다면 그는 그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망치가 그의 가슴에 "꽝꽝" 못을 박았을 것이다. 쉽게 빠지지 않고, 빼내도 상채기의 흔적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그의 그림, 그의 만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그 망치가 있고, 그에 못 박힌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 캐릭터가 은연중 작가를 닮듯이, 그의 삶이 그의 만화 속에 있다.
작가인 그의 분신이랄 수 있는 캐릭터 '장독대'는 <주간중앙>에 연재했던 <바람소리>(80)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름이 왜 장독대인가. 그 뿐인가. 까목이, 팔매, 또매, 머털도사, 방실이. 한결같이 뭔가 꽉 차지 않고 빈 듯한 느낌, 나보다 못한 것 같아서 오히려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름. 얼굴은 두말할 나위없이 이름만금이나 '세련미'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토속적인 분위기를 찾다보니" 자연스레 등장했다는 장독대, 잘 안 씻어 목이 새까맣다는 섬소년 까목이, 돌팔매의 줄임말 팔매, 또 매를 맞는다는 또매, 머리털을 뽑아 도술을 부려 머리털에서 '리'자만 뺐다는 머털도사, 이전에 출가한 여자들을 남편 성에 맞춰 김실이니 박실이니 하고 불러 탄생한 방실이. 그의 만화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이름은 그 어느 만화가의 것보다 못 생겼고 촌스럽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단행본 <임꺽정>의 서문을 쓴 박재동씨(시사만화가)는 그런 이두호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두호 선생의 임꺽정을 보면 안된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 고래고기를 파는 할마시가 있는데 그걸 처음 썰어서 새우젓장에 찍어먹으면 꼬랑한 게 별맛이 없고 이상하다. 그런데 집에 오면 그 고래고기 생각이 영 잊혀지질 않는다. 임꺽정도 그렇다. 짚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메주 뜨는, 혹은 된장냄새 같기도 한 게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기 어려운 늪과 같다. 그래서, 기나긴 임꺽정의 흐름에 서서히 빠져들어 수무 권을 다 볼 때까지 다른 일을 못하게 되지 않으려면 그 놈의 첫 장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임꺽정을 보면 안된다."
이희재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해가 중천에 뜨면 일어나고 새벽까지 일하는 '올빼미형'인 그가 한창 작업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잠시 <임꺽정>을 손에 쥐었던 것이 실수였다. 책을 손에서 놓고 보니 그야말로 "날이 샜다".
현재 기독교인인 그는 불교에 관심이 많다. 어찌보면 '열성' 크리스천은 아닌 듯 하다. 그는 "도덕심 없는 맹목적 신앙은 광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작가관에는 '도덕심'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는 개인적인 성향이라고 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그의 만화에 그대로 묻어난다.
불교를 공부하진 않았지만 어릴 때 할머니나 어머니의 냄새 가운데 하나였던 불교 냄새가 그의 만화에서도 난다. 그는 "불교사상의 기본이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한다. <임꺽정>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땡중 떠벌스님이 임꺽정과 헤어지면서 내년에 해동하거든 금강산 수미산에서 만나자고 하자 임꺽정이 장담은 못하겠다고 했다. 떠벌스님의 한 마디.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 외에 장담할 일이 어디 있어야지."
이번엔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임꺽정>의 한 대목. 떠벌스님이 포졸들 술판에 가서 술 한 잔만 달란다. 포졸이 중이 술은 무슨 술이냐고 면박을 주자, 떠벌스님 왈 "중이 어찌 술을 먹수? 술이 중놈 뱃속에 잠시 머무는 게지." 술을 한 잔 들이키고 이번에 북어를 달라고 하자 포졸이 술이야 곡차라지만 북어는 고기 아니냐고 덧댄다. 떠벌스님 왈 "북어고기를 먹자는 것이 아니라 그 북어를 구제하자는 것입니다. 나야 어차피 죽으면 극락에 갈 몸! 내 몸 속에 든 그 북어도 덤으로 극락에 갈 게 아닙니까?"
그가 매우 아끼는 작품 <덩더꿍>(87)을 보면 그가 불교에서 느꼈다는 '더불어 사는 삶'의 구체적 지향이 드러난다. 조선시대 역신 가운데 가장 나쁜 짓을 많이 한 역신 홍성윤(원래 홍윤성)의 삶에 '독대'를 투입시켜 결국 독대가 홍성윤을 살해하고 처형당한다는 내용. 맨 마지막 장면이 억눌림에 침묵했던 민초들의 작은 반란이었다. 덩더꿍, 덩더꿍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씨! 그것은 작은 불씨였다. 그러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는 자막이 겹쳐진다.
그의 말대로 그는 여자에 약하다. 그의 수 많은 작품 가운데 여자가 총괄 주인공을 맡았던 적이 없다. 간혹 정사장면이 부득불 나와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은 간단하다. "꼭 사실적으로 묘사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여자를 잘 못 그린다"는 것.
그렇다면 "역사만화에서는 시대 배경이 왜 조선시대에만 국한되는가, 근현대사를 다룰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근현대사를 다루고는 싶지만 자신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전봉준만 그리려고 해도 왜놈이 등장해 계급장도 그려야 하는데 그 작업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고, 내 선(線)이 거기에 적당치 않다. 고구려나 신라는 자료가 너무 없어 그리기 힘들고, 내 폭이 좁아서 그렇다. 그러나 동학은 거기에 관심 많은 백성민이 그리면 되고, 개화기는 오세영이 그리면 되지 않느냐. 하나 하나 자기에게 적합한 점 하나만 찍으면 되지, 지 혼자 역사의 선을 다 그을 수는 없는 거다."
그의 작업은 완전 수작업이다. 그나마 문하생도 없다시피 하다(7년째 그의 문하에 있던 강희우씨도 그만 하산할 때가 됐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내 선도 (남의 손 타기가 적합하지 않아) 그렇고, 내 작품을 남에게 맡기는 게 탐탁치 않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그래서 이희재씨의 '떨림선'을 좋아한다. 이희재씨말고는 다른 이가 할 수 없는 그 만의 선이니까. 그런 선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만화가 살려면 내처럼 지 혼자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현세처럼 팀을 꾸려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만화의 특성이 그렇다. 그러나 팀 체계로 간다면 반드시 펜터치나 스토리 작가, 만화가가 전문가급이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를 겨냥할 수 있지."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의 문하생 구조, "기업이나 하면 어울리고 잘 할 것 같은 사람들"이 공장을 차려 놓고 기능공들을 들여다 놓은 듯한 비뚤어진 문하생 구조를 매우 못 마땅해 한다. 그림은 어차피 철저하게 혼자 그리는 것,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만화가의 가장 큰 권리는 "안 그리는 것"이듯이.
그와 친한 이들 - 주로 그가 아끼는 후배들이지만 - 이희재, 백성민, 오세영 등을 보면 그와 닮았다. 그 후배들에게 이두호는 언제나 넉넉히 품어주는 '대부'이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맞는 동지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고집불통의 작가들이다. 이희재씨는 이에 대해 "다들 이두호 선생에게 전염됐다"며 웃는다.
그리고 싶지 않으면 안 그린다는 게 만화가의 가장 큰 권리라는 이두호. 그의 작업실에 가보면 왜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작업 도중 그는 끊임없이 이 책 저 책에 손을 댄다. 그리다 모르면 즉시 책을 뽑는다. 모르는 상태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
정식 인터뷰를 하러 두번째 그를 찾아갔을 때도 그의 작업대에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어사전이 펼쳐져 있었다. 취재 후 기사를 쓰면서 그가 말한 생소한 우리말의 철자가 헷갈려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사전에 안 나올 거라며 잠시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희우야, 나는 중간사전을 찾아볼 테니까, 너는 거기서 큰사전 찾아봐라... 예, 사전에 안 나오는 말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그의 작업실 한 켠에는 박수동씨 집에 놀러갔다가 '슬쩍'해왔다는, 박수동씨가 쓴 '고인돌체' 글귀가 담긴 액자가 놓여 있다. '童心如仙'이라는.
취재 후기|1995년 <우리교육> 기자로 있을 때 만화가 이두호 선생을 만났다. 당시 잡지에 실린 기사에는 쓰지 않았지만, 이두호 선생이 꼽는, 타고난 천재 만화가는 고우영 선생(2005년 4월 작고)이다. 이두호 선생은 "같이 술 먹고 화투 치고 밤을 새도 고우영은 '일필휘지'로 글씨를 쓰듯 그림을 그려 일간지 연재를 마감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한다. 그렇게 그렸다고 해서 고우영의 만화가 삼천포로 빠지거나 스토리가 부실해진 적이 있나? 그건 타고난 재주"라고 말했다.
이두호 선생은 매일 아침 정해놓은 시간에 출근했다가 정해놓은 시간에 퇴근하는 '범생이' 회사원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후배들과 어울려 한 잔을 해도, 일간지 마감 탓에 가급적 자정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정상적인 출근을 위해서다. 출근이 늦어도, 퇴근이 불규칙해도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는데 그런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