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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Jun 09. 2020

인물|유일한, 자본주의 '논리'보다 '윤리'에 철저

이한기의 인물탐구


지난 3월 1일 MBC-TV 9시 <뉴스데스크>에서는 '해외 독립군 맹호군'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방영되었다. 50여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해외 독립운동의 또 다른 역사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맹호군은 태평양전쟁 직후인 1942년 8월 29일 한인 밀집지역이었던 로스엔젤레스에서 발기, 후에 임시정부의 공인을 받은 조직이었다. 뉴스 말미에서는 "당시 맹호군 창설의 주역은 재미 한족연합회 집행위원장인 김호씨와 유일한씨"라고 소개됐다. 이보다 7개월 앞선 지난해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미 지하 항일계획 - 냅코작전 전모 첫 공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8·15 광복 직전 미국 전략정보국(OSS)이 한국인들로 구성된 특수공작조를 한국에 침투시켜 지하조직을 결성, 무장항일운동을 벌이게 하려던 '냅코(NAPKO) 작전'의 실체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 작전에는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 등 재미 유학생들과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된 한국인 노무자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확인…." 


지난 71년 4월 8일 당시 시가로 36억2000만원에 해당하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유일한(柳一韓) 박사.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후인 91년 3월 19일 그의 외동딸 유재라 또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200여 억원에 달하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최근 밝혀진 해외 독립운동사는 그동안 양심적인 기업가로만 알려졌던 유일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모습은 그 누구보다 교육에 대한 노력과 열정을 실천으로 옮겼던 교육자로서의 유일한이다. 그는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돼 있어야 한다"며 그러한 소신을 묵묵히 실천했다. 


여권 직업란에 '교육자'로 표기

 


기업경영 일선에 한 발 물러선, 말년에 접어든 유일한 박사의 낙은 유한양행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사택의 창가에 서서 사색에 잠기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한학원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칠십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가 생을 갈무리하는 길목에서 잠시 멈춰 서서 떠올렸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거기(미국) 가서는 저는 …… 고등학교쯤 됐지요. 거기서 한 과정은 무슨 과정이니 하면 대패, 톱 등을 가지고 의자를 만들고 뭣도 만들고. 그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저는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쇠를 가지고 망치를 만들고 이것도 만들고 저걸도 만들고. 공업에서 하는 것에 취지가 많았어요. 그걸 좇아 하려다보니 세계 큰 자동차회사 포드에 가서, 누구한테 졸라서 거기 가서 일을 1년 반 동안 했어요. 


근데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왜 그런고 하니 무슨 일을 해도 취미를 갖고 하면 될 것은 다 된단 말이에요. 될 것은 다 돼요. 그래가지고서는 이후에 선생이 된다든지, 회사의 인도자(引導者)가 된다든지, 큰 공장장이 된다든지. 그렇게 될 기회가 아주 많으니께. 이 사람이 바라기는 여기 있는 몇 백명이 한국 사회에 나가서는 그런 인도자들이 돼 가지고서는 말이지. 선생도 되구 공장장도 되구. 그렇게 해 나갔으면 다시 바라고 원하고. 감사합니다." (60년대 후반 유한공고 졸업식 치사) 


녹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투리 섞인 어눌한 목소리. 그는 우리나라 말로는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워 하는 듯 했다. 


유한공고 초대 교장이었던 손종률(64)씨는 "유일한 박사는 본인 스스로도 기업가보다는 교육자로 불리길 원했다"고 회고한다. 유일한 박사는 60년대 중반 해외여행 때 '사장'이 아닌 '교장(Director)'의 직함을 새겨넣은 명함을 갖고 다녔고, 여권의 직업란에도 교육자라고 표기했다. 돈을 버는대로 공익단체나 교육사업에 다 쏟아부어 종종 주변사람들로부터 "돈을 좀 더 불려 더 크게 투자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유일한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교육은 시기가 중요해. 돈을 벌어서 투자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이미 늦어. 교육이란 필요한 때 제 때 투자해야 되거든.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인) 희생을 강요해선 안돼." 


유일한 박사는 '모든 생명은 한 번 태어나지 두 번 태어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지금 당장'이라는 원칙 아래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넣었다. '기업이야 한 번 망해도 다시 일으키면 되지만 교육은 한 번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하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만약 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국가, 교육, 기업, 가정 순"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박사.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였던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의 최종 목표는 결국 '국가와 교육에 대한 재투자'였던 것이다. 


아홉살에 단신으로 도미(渡美)

 


유일한 박사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柳一馨). 동학혁명, 갑오경장, 청일전쟁 등으로 나라 안팎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부친 유기연(柳基淵)과 모친 김기복씨의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친 유기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일찍이 개화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인 개안된 사람이었다. 또한 이재에도 밝아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싱거(Singer)미싱 평양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견직물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상인만은 아니었다. 1905년 경술국치 이후 가족과 함께 북간도 연길현으로 건너가 살 때에는 독립당의 재정 후원을 맡은 적도 있다. 


딸들까지 고녀(여고)에 보낼 정도로 남다른 교육열을 보였던 그는 개화입국론에 심취, 장남 일형이 만 아홉살 되던 해(1904년)에 그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일형은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연의 멕시코 순방을 따라 갔다. 장남을 어린 나이에 연고지 없는 외국으로 보낸 부친의 결단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미국 중부 네브라스카의 커니라는 조그마한 동네에 도착한 일형은 침례교 신자인 독신녀 자매의 가정에서 기식하며 고달픈 고학의 길에 접어든다. 일형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박용만이 세운 헤스팅즈 소년병 학교를 거쳐 네브라스카 고교에 다닌다. 일형(一馨)이라는 이름이 일한(一韓)으로 바뀐 것도 이 즈음. 


중학교 시절 일형은 학비를 벌기 위해 잠시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보급소장이 그의 이름을 자기 편의대로 '일한'으로 표기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한 끝에, 한국의 '한(韓)'자가 들어간 이름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겟다고 생각한 일형은 북간도에 계신 아버지께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고, 일한으로 이름을 바꾸는 문제를 상의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 생각이 정히 그렇다면 바꾸도록 해라. 그리고 네 동생들의 돌림자도 한(韓)으로 하겠다"는.


일한은 네브라스카 고교 시절 미식축구와 웅변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학교신문에 "얼굴색이 노란 동양 출신 학생. 키는 작지만 날렵하고 불같은 주지를 지난 선수"라고 소개되기도 했고, 축구 덕분에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한 번은 웅변대회에 나가 미국 학생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해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 '유일한'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온 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주었던 두 자매와 정든 네브라스카를 뒤로 한 채 미시간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916년(21세) 동북부의 명문 미시간대학 상과에 입학한다. 


숙주나물로 돈 번 재미사업가 



대학 4학년이었던 1919년(24세)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가.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기초했고, 이것을 계기로 재미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였던 서재필, 이승만 등과 만나게 된다. 당시 재미한인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로는 안창호, 서재필, 이승만, 박용만 등이 있었고, 이들은 제각기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입장 차이를 보였다. 


유일한 박사는 서재필과는 두터운 교분을 맺은 반면 이승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포들이 걷어준 운동자금을 사사로운 데 사용하고, 독립운동의 열정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야심이 많았던 이승만의 행보에 적잖이 실망한 것이다. 이러한 악연은 해방 후에도 계속돼 유한양행은 정부로부터 몇 차례의 트집잡기식 세무사찰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아르바이트를 해 상재(商才)를 보이고, 그의 아내가 된 중국 광동성 출신 호미리를 만난 것도 대학시절의 일이다. 호미리는 미시간대학을 거쳐 코넬 의대를 마치고 동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소아과 의사 자격증을 획득한 인텔리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잠시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에 다니다 곧 뉴욕에 있는 제네럴 일렉트릭의 회계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서 일하는 동양인이라고는 혼자 밖에 없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1년 남짓 지났을 때 동경지사 책임자로 내정되는 등 출세가도가 눈 앞에 펼쳐질 무렵 돌연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 곳에 계속 있으면 나야 걱정없이 살 수 있겠지만, 고국의 동포들을 놔두고 나 혼자 호의호식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디트로이트로 옮겨 간 그는 본격적인 장사에 나선다. 물품은 중국음식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숙주나물. 아직 보관·유통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금방 썩거나 말라버리는' 숙주나물을 신선한 상태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몇 개월의 연구 끝에 통조림에 넣어 장기보관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본격적인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위해 대학 친구 웰레스 스미스와 합작,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만들었다. 1922년,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라초이'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24년(29세) 거래선 확보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20년 만에 고국 땅을 밟고 돌아온 일한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라초이'에서 손을 뗀 뒤 장차 한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1925년 미국에서 '유한주식회사'를 세웠다. 사장에 서재필, 부사장에 정한경이 취임했고, 그는 재무를 맡았다. 유한양행의 상표이자 신용의 상장이 된 '버들표'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 때다. 회사 상징 마크인 '버드나무'가 새겨진 조각은 서재필이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되라"는 뜻에서 선물했던 것이었다. 


자본주의 '논리'보다 자본주의 '윤리'에 철저

  


유한양행은 1926년, 그의 나이 31세 때 설립됐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그는 이듬해에 귀국, 유한양행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후일 약품회사로 이름이 난 유한양행이 처음 신문광고를 낸 건 약품이 아니라 수입염료였다.

 

거래선 확보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니까 하루종일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의 의복이 흰색이라 쉽게 더러워진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한 비경제성을 없애기 위해 염료제품을 수입, 판매했던 것이다. 


첫 약품 광고 '금계납(金鷄納)'과 '장충산(腸蟲散)'에 대한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건 수개월 후인 1928년 7월 9일. 유한양행의 약품광고는 기존 제약회사들의 것과는 달랐다. 당시 약품 선전들은 대부분 어떠한 질환에 효능이 있는지에 대한 언급없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이었는데 반해 유한양행은 구체적인 질환, 효능 등을 명시하고, 버들표 마크와 의사 호미리·약사 나찬수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제품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회사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방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유한양행의 사세가 확장일로에 있던 때였다. 만주와 국내의 시장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 간부가 유일한 사장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다. 


"사장님, 지금 국내에도 마약중독자들이 날로 증가해 가는 추세라 헤로인, 모르핀 재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제조 판매한다면……." 


"뭣이라고! …… 자네는 도대체 지금껏 유한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아니, 내가 지금껏 자네 그 머리 속에, 자네 그 가슴 속에 넣어준 것이 고작 그런 짓이나 생각하고 그런 말이나 하라는 것이었단 말인가? 고약한! 어서 썩 물러나게!" 


다른 제약회사들이 이윤만을 생각해 앞다퉈 마약 성분이 함유된 진통제 판매에 열을 올릴 때에도 유한양행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덜 남더라도 가정에서 필요한 상비약 생산·판매에 주력했다.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손실분 함량까지 고려해 생산하는 게 유한의 기업정신이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버들표만 찍혀 있으면 믿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1930년대 후반 유한양행은 보관시설비가 엄청난 반면 수요가 매우 적어 그 누구도 취급하려 하지 않았던 긴급약품, 맹장염 혈청 '엔티겐그린'과 뇌척수막염 혈청 '엔티베닝고코스'의 보관시설을 갖추고, 전국 각지의 병원에서 요청하면 어느 때라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철도와 특별협약을 맺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일한 박사를 '자본주의의 논리보다 자본주의의 윤리에 철저했던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권력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유한양행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수 차례 세무사찰을 받았지만 탈세 사실이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세무사찰 후 담당기관으로부터 우량납세·모범업체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은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일한 박사는 평생 정치 참여는 물론 그와 관련된 발언을 삼가했다. '정치는 정치가들이, 기업은 기업가들이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그가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 오를 때 유한양행 본사(서울 대방동)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지지 의사를 나타낸 적이 있었다. 철저히 반(反) 이승만 입장이었던 그가 박정희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1963년쯤일 겁니다. 유일한 회장님과 함께 일본 출장을 떠난 적이 있는데, 비행기 안에서 제게 묻더군요. '님자,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 같습니다.' '맞아, 나도 처음엔 박정희를 테러단 두목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래도 뭔가 하려는 것 같애.'" 


연만희 유한양행 회장(65)은 유일한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정치적 색채나 개인 박정희가 아니라고 말한다. 몇 년이 흐른 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갖추자 유일한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던졌다. "역시 배운 게 없어서 욕심이 많아……." 


"유한동산에 울타리를 치지 마라"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1일 경기도 부천시 유한대학교에서 열린 2018년도 전기 제40회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 2019.2.21/뉴스1

 

재단법인 유한학원이 세워진 건 그로부터 5년 후인 1962년 10월 18일. 1964년 3월에 한국고등기술학교(유한공고 전신)의 첫 신입생을 받았다. 유일한 박사는 학원설립 후 잠시 이사장을 맡았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명선 박사(작고·전 연대 의대 교수)에게 물려주고 난 뒤 학교운영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유일한 박사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오래 전부터 김 박사는 경제적인 도움을 줘야 할 학생들이 생길 때마다 유일한 박사에게 찾아가 '손을 내밀었고', 그 때마다 유일한 박사는 "또 강도 오셨구만" 하며 두말없이 필요한 만큼의 돈을 내주었다. 


유일한 박사의 교육관은 매우 독특했고, 그만큼 분명했다. 인재를 기른다거나 육영사업을 하면 보통 인문계열의 엘리트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그는 일관되게 직업기술교육을 선택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무엇보다 기술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현장에서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첫 육영사업으로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한 것이나 유한공고를 세운 것도 이같은 교육관에 따른 것이었다. 이해득실을 놓고 보자면 사실 유한양행으로서는 구태여 공고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유일한 박사는 철저히 미국식 합리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가족에게 분배한 주식조차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환수해버릴 정도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또한 만년필 하나를 19년씩이나 쓸 정도로 근검 절약했다. 그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간혹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간미가 없는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는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일방적으로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도록 했다. 회사에서 사택을 지어주자 끝내 개인 주식 배당금에서 비용을 지불했고, 유한양행에서 만든 약조차 사서 먹었다. 그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며 꾸준히 공익과 교육사업에 투자했다. 


초창기 유한양행에 다니던 유능한 사원들이 다른 제약회사로 스카웃되어 갈 때도 "그럴 수 있느냐"는 회사 간부들의 반응에 "유한이 인재를 길러 사회에 배출한 것인데 뭐가 기분 나쁘냐"고 반문했던 유일한 박사. 그러나 어렵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고, 한 번 밉게 보면 끝내 믿지 못하는' 호(好), 불호(不好)가 분명한 독선적인 면을 보였다. 


동양의 정서로 볼 때 유일한 박사의 개인적인 삶은 그다지 매끄럽거나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동생 특한, 그리고 아들 일선과 법정소송까지 벌여야 했던 쓰라린 기억, 20년이 넘게 부인 호미리와 별거해야만 했던 일은 개인 유일한의 불행했던 이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짐조차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그는 임종하는 순간까지 부인과 아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1971년 3월 11일. 그의 나이 76세였다.

 

"유한동산에는 절대로 울타리를 치지 마라. 유한의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해달라"는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된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유일한이 남긴 건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시대의 양심이었다.




※ 1994년 <우리교육> 기자일 때 썼던 유일한 박사에 대한 글입니다. 페이스북 '노트'가 긴 글 창고로 유용한 지 테스트할 겸 기록삼아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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