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 금성관
나주는 출장지의 길목 또는 인근에 있었던 터라 식사를 위해 그 유명한 나주곰탕 전문점 OOO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우연히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이 최고로 유명한 식당이었던 것이다. 이번 나주 여행에서도 누군가 선정한 식당을 따라가는데 그 OOO 식당이었다. 식당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곰탕전문점 중 처음 그 식당을 찾은 이유는 바로 앞에 근사한 문화재 같은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983)부터 1895년 나주 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900년이 넘도록 나주목으로 유지된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5도 양계, 3경, 4도호부, 12목이 있었는데 12목은 지금의 도청소재지 정도의 행정단위이다. 5도 양계의 행정구역 당시 전라도에는 전주, 나주, 승주에 목을 두었다. 목사는 왕명을 받은 지방관인데 중앙집권체제에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책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딴 지역명이다. 과거의 나주는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금성관은 1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색이 칠해지고 마당에 돌을 깐 것을 제외하면 계절이 바뀐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들이 호위하듯 서있고, 마당의 넓이는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의 면적에도 비교할만하다. 훤히 트인 넓은 앞마당에 머물러 있으니 폐 속의 묵은 공기가 허공으로 뛰쳐나오는 느낌이다. 황톳빛 텅 빈 마당 위에는 산들 바람이 이리저리 뛰노는 것 같다.
금성관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나 사신이 오면 숙소로 활용되는 현재의 호텔 같은 시설이다. 금성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객사다. 객사는 정실과 좌우 익실로 구성되는것이 일반적이다. 가운데 정실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를 안치하는 곳이다. 매월 1일과 15일이 되면 그 앞에서 절을 올렸다. 좌우의 익헌은 사신의 숙소로 사용 되는데 좌익헌인 벽오헌이 우익헌 보다 길이로만 두 배 정도 크다. 높은 직책의 사신들은 좌익헌을 이용하였다. 좌의정이 우의정 보다 높은 직책인데 익실의 등급도 높낮음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금성관 좌익헌의 이름을 벽오헌이라 칭한 것은 관내에 커다란 벽오동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한 그루의 5미터쯤 되는 커다란 벽오동 나무를 볼 수 있다.
『장자』의 <추수편>에는
"남방에 원추(鵷鶵)라는 새는 벽오동이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고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는다"
라는 구절이 있다. 원추는 봉황인데, 사람이 벽오헌에 들었으니 극진히 모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벽오헌에 머문 관리나 사신은 봉황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 좋은 잠을 이루지 않았을까.
금성관은 객사의 역할로만 쓰여진게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장소이고, 을미사변때 명성황후의 빈소가 차려졌던 곳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나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객사의 원래의 모습이 상당부분 훼손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수 차례의 복원작업을 통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된 상태이다.
금성관은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금성으로 불리다가 고려 시대에 나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에서 1987년까지 나주군의 일부가 또다시 금성시로 불린 적이 있다.
햇볕이 내리 쬐는 앞마당과 달리 뜰에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높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지난해 떨어진 은행들이 구슬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벽오헌 넓은 마루에 걸터앉아 봉황이 될 새 한 마리가 벽오동 나무에 앉기를 기다린다. 한가로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