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 적어도 서너 차례 엠티(M.T)를 다녀올 정도로 고창은 변산반도, 내장산과 함께 전북지역에서 유명한 여행지이다. 특히 삼천여 그루의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선운산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고창에 가는 이유는 선운산을 간다는 말로 들릴 때가 있었다. 한 번의 여행에서는 원시인 분장을 한 수십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마주치고 놀라 자빠질뻔한 적이 있었는데, 심형래 감독의 영화 <티라노의 발톱>의 배우들이었다. 고인돌 선사유적지와 선운산의 신비로운 경관이 영화의 촬영장소로 이용된 것이었다.
고창군의 지세는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아 대부분 물이 북쪽이나 서쪽으로 흐른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 대사가 도를 깨친 다음 잠시 고창의 소요사에 머물렀을 때 고창의 형세를 보고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다소간의 음양택(陰陽宅)에 역기(逆氣)가 기묘하다” “용취팔각(龍聚八角) 방마형(放馬形)은 흠(欠) 없이 생겼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원조 도선대사의 『옥룡자유산록』에 실린 글이다. 그는 고려의 건국을 예견한 적도 있다. 도선 대사가 개성에 있는 왕륭의 집에 기거할 때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이 집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태조 왕건이었다.
고창읍성
나에게 다시 한번의 고창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고장의 또 다른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날을 둘러싼 고창읍성으로 간다.
고창읍성은 1453년에 완공된 왜구의 침략을 막고 세곡창이 있는 법성포를 지키기 위해 전라도 19개 고장의 백성들이 쌓은 자연석 성곽이다. 743m 높이의 방장산을 바라보며 1,684m의 길이로 관아를 둘러싼 모습이다. 모양성(牟陽城)이라는 이름은 고창읍성이라고 고쳐부르기 전의 이름이다. 모는 이 고장의 특산물인 보리를 뜻한다. 군민의 날의 명칭을 “고창모양성제”로 쓸 만큼 이곳 사람들은 고창읍성을 모양성으로 부른다. 동행한 출판사 대표이자 한국여행작가협회 여행작가로 활동하는 유철상 작가의 고향이 고창인데 그 또한 모양성이 더욱 익숙한 지명이라고 말한다.
고창읍성은 평상시 주민들은 성밖에서 생활하다가 전쟁 시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거주하며 관군과 힘을 합쳐 싸울 수 있도록 구축된 성곽이다. 축성에 관한 자료와 성곽의 각자에는 참여했던 마을의 이름과 연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호남지역의 열아홉 개 고을에서 축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나의 고향 익산도 포함되어 있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자연석이 대부분이지만 사찰이나 다른 건축물에서 나온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도 성벽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각기 다른 돌모양으로 쌓은 성벽
이곳에는 현재까지 답성(성 밟기) 놀이가 전해진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를 돌면 극락 승천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 다분한 이야기가 있다. 성을 밟으면 성은 굳건해질 것이고 성 주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전쟁 대비 훈련을 겸한 놀이다. 마치 지금의 민방위훈련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곡식이나 돌을 머리에 이고 돌았다는 것은 이 놀이를 통하여 성곽에 군량미와 전투에 쓸 돌을 제공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농사가 주요 일거리였던 고창 주민들에게 고창읍성은 생활 터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이었기 때문에 주민들 또한 이 성곽을 지켜내기 위해 더욱 합심하였을 것이다. 다른 읍성과 달리 평지가 아닌 언뜻 보면 산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언덕에 있는 이유로 1910년 일제의 읍성 철폐령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창은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비교적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던 지역이었다. <고창군가>에는 ‘십여만 고창군민’, ‘전답이 비옥하면 인심도 다습다네’라는 가사가 있다. 외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농경 중심인 고창군의 인구가 십만 명을 넘었을 때가 있었나 싶을 테지만, 고창군의 인구는 1960년대에는 이십만 명, 1980년대까지 십만 명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부터 인구감소가 가속되어 지금은 오만 이천여 명으로 줄어든 상태이다.
이곳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도 유명하다. 고창읍성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광해>, <고산자, 대동여지도>, <불멸의 이순신>, <관상> 등의 작품이 촬영된 곳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19개 고을의 축성구간이 표시된 팻말에는 고창을 비롯하여 군산, 익산 그리고 멀리 제주의 백성들까지도 참여한 구간들이 표시되어 있다. 전라도 19개 고을에서 참여하여 3년 만에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성 앞으로 다가가면 세 여인이 돌을 머리에 얹고 답성놀이를 하는 동상이 있다. 여인들의 표정은 놀이를 즐기기보다는 마치 전투 준비에 임하는 것처럼 담담하다.
산사의 소원탑 돌무더기 모양처럼 돌을 쌓은 성벽이 보인다. 각기 다른 크기와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의 모양이 엉겨서 단단한 성이 되었다. 엉성하게 쌓아야 오래간다는 옛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문 격인 북문(공북루)의 옹성은 경사면과 평지의 경계에 앉아있는 커다란 우물처럼 보인다. 고창읍성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공북루와 옹성
성곽길의 시작 부분은 난간벽이 있지만, 언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성벽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야 하지만, 멈추어 서서 성 밖을 바라보면 가릴 것 없는 고창의 시가지 모습과 멀리 지켜서 있는 커다란 방장산의 풍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동북치를 지나면 관청의 뒷면이 보이고 성 안길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성 안에 숲을 이룬 커다란 낙락장송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소나무 숲이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라고 한다. 숲길에는 소나무가 내린 뿌리가 계단이 되어준다. 뿌리를 가볍게 밟고 다시 성곽길에 오른다. 동문(등양루)의 옹성은 북문의 아름다움보다 못하지만 높은 곳에 있어 산성의 정취가 가장 뛰어난 곳이다.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성 밖 아래 봄의 꽃길 또한 고창읍성의 보물이다.
고창읍성 성벽길
성안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맹종죽림이 있다. 검푸른 색깔의 맹종죽은 1938년 유영하 선사가 불교 전파를 위해서 이곳에 보안사(普眼寺)라는 절을 짓고 주위에 심어놓은 대나무 숲이다. 보안사는 1973년 독립가옥 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말았다. 맹종죽림에는 하늘을 오르는 용이 대나무를 타고 오르는 모습의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객사와 동헌 등의 건물은 후대에 복원된 모습일지라도 울창한 숲 안에서 과거의 향기가 풍겨 오르는 곳이다. 특히 수령과 고위층의 접대를 위한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官廳) 또한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마치 조선 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돌계단을 오르면 잔디처럼 깔린 풀밭이 마당에 펼쳐져 있고, 건물을 잃은 주춧돌이 점점이 박혀있다.
수령과 고위층의 접대를 위한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官廳)
시원스럽게 가로로 뻗은 여섯 칸의 관청 뒤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있다. 뒤꼍으로 흘러드는 바람 때문에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잠시만 쉬었을 뿐인데 성곽길을 올랐던 피로가 황급히 사라진다. 숲 속의 향기와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가야할 발길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