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군산 신시도
마을 입구에는 네 명의 학생이 다니는 신시도초등학교가 있다. 비록 학생 수는 적지만 규모는 상당하다. 학생이 몇 명 되지 않는 학교의 크기가 큰 이유는 예전의 학생 수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마을 사람들의 모임이나 대피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의 벽에는 아이들을 위한 만화가 그려있고 커다란 나무들이 담장 밖 마을 길을 구경하듯 서 있다. 마을 주차장 근처에서 길이 끊긴 듯하더니 구부러진 길을 돌아 나오니 다시 잘 닦인 길이 나온다. 바다로 먼발치 나온 포구와 바다의 모습이 오밀조밀 구성지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풍경만 바라보다 가는 것이다. 책도, 노트북도 없이 카메라만 들고 온 이유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해보았지만 무언가를 하고 갔던 적이 대부분이었다.
숙소를 선택해야 한다. 장마철인 까닭에 숙소의 양호한 시설상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포구 앞 언덕에 새로 지은 듯한 펜션이 보인다. 하얀색을 칠하여 보기에도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펜션 주차장이 텅 비었다. 펜션이 운영되고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살피다 보니 인기척이 들린다. 주인이 객실 하나를 청소하는 중이다.
머무는 손님이 없는 덕에 정오쯤 객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목재로 내부를 마감한 유럽식 독채 숙소가 네 동이 있고, 객실에 조그만 수영장이 딸린 풀빌라 형식의 객실이 다섯 채가 설치되어 있다. 언덕 위로는 마치 가정집 같은 독채도 한 채 있다. 방은 정말이지 손님을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처럼 청결 그 자체다. 건물의 뒤편에는 선유도 위로 걸친 물안개로 나가는 문처럼 계단 위로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다. 뒤로는 무녀도와 선유도에 이르는 낮게 내린 구름 아래로 고군산대교가 그림처럼 놓여있다. 포토존을 전망대 삼아 바다를 바라본다. 보슬비가 내리는 포구의 풍경은 시간이 멎은 듯 모든 게 멈추어 있다. 일렁이는 고깃배 위에 일렬로 앉은 갈매기들이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린다. 펜션 앞길은 나지막한 산으로 연결되어 있어 산책하기에도 적당해 보인다. 비 오는 한가한 평일인 이유로 주인을 귀찮게 해 가며 펜션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카페 같은 분위기의 관리실에는 선유도 등의 근처의 섬과 포구를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오두막 같은 손님마다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바비큐 시설도 여러 곳이다.
주인 어르신은 나에게 원하는 객실을 주겠다고 한다. 혼자였지만 나는 그중에 시설이 가장 좋은 풀빌라를 원하고 있었다. 차마 망설이고 있는데 주인이 풀빌라 한 채를 이용하라고 한다. 객실 내부는 실수라도 음료수라도 벽에 튀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하얗고 청결하다.
“혼자 왔는데 너무 커요, 수영할 일도 없고요.”
손님도 없고 번잡스럽게 이용할 것 같지 않아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일반 객실의 요금으로 풀빌라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내가 쓴 책 한 권을 선물로 건넸다.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었다.
해마다 이곳 근처 무녀도캠핑장에서 고향의 형제들과 캠핑을 하였는데, 올해는 이 펜션을 이용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펜션에서 이번에 선물을 받았다거나 시설이 괜찮은 이유만은 아니다. 신시도는 나와 같은 여행을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요소들이 여러 곳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1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신시도 자연휴양림이 있다. 주변의 섬과 바다를 보며 산책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곳의 전망대가 있다. 무녀도와 선유도와 장자도는 차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위치여서 고군산군도 여행의 숙소로 삼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곳과 가까운 옥구에서 태어난 신라의 학자 최치원 선생이 머무르기도 하였다는데, 주변 월영대에는 최치원 선생을 모신 신당 터가 남아있다. 최치원의 흔적은 월영대를 비롯하여 선유도 금도치굴, 내초도 금돈시굴, 신시도 대각산, 옥구향교 등에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임 씨 할머니 전설도 있다. 스무 살 넘도록 아무리 힘을 주어도 주먹이 펴지지 않는 증세를 가진 처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죽자 무덤을 만들려고 땅을 파니 학이 날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처녀도 곧 언덕에서 미끄러져 죽고 마는데 그때 주먹을 펴니 손바닥에는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온 마을 사람들은 왕이나 왕비가 될 운명이었다고 여기며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부제 서품을 받고 최초로 고국 당을 밟은 곳이 이곳 신시도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의 담벼락에 벽화로 그려있다. 1847년 선교를 위해 프랑스 배를 타고 왔는데 근처에서 난파되어 30여 일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신시도는 400여 명이 사는 작은 섬이지만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빗소리로 물든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바다로 향했다. 어제의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우산을 받지 않으면 옷이 젖을 만큼 비가 내린다. 어제 근처에 보아둔 슈퍼에 갔다. 낚시도구를 빌리기 위해서다. 채비까지 구입하고 컵라면에 물을 부어 선착장으로 향했다.
아침 일곱 시 무렵인데 열 명 정도의 강태공들이 벌써 낚싯바늘을 물에 담그고 있다. 바다를 구경 나온 사람이 “잡히긴 잡혀요?” 하며 ‘낚시가 되겠냐? 여기에서?’ 하는 느낌의 어투로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지나간다. 연이어 세 팀이 지나가며 말을 걸어왔지만 모두 ‘헛고생이야!’ 하는 말투의 질문을 던지고 간다.
사람들의 뒷모습이 희미해지자 바로 옆의 강태공의 낚시줄이 활처럼 휘어진다. 바다에서 물총 같은 것을 쏘는 것 같다. 대형 갑오징어가 낚시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온다. 갑오징어를 낚시로 잡다니. 이제부터 시작인가 보다 나의 낚싯대에도 입질이 시작된다. 복어가 잡히더니 놀래미, 베트남에서 먹던 대형 새우(잡힌 건 15Cm)가 연이어 올라온다. 금세 두 시간이 흘렀고 나는 잡힌 고기를 모두 놓아주었다. 놀래미는 잡히자마자 놓아주었는데도 이미 저세상으로 가신 것 같고, 다른 고기들은 잘도 헤엄친다.
낚싯대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 짐을 꾸리고 있으니 다정한 주인아저씨는 늦게 나가도 되니 더 쉬고 가라고 한다.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마신 후,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며 차에 올랐다. 서울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배웅처럼 우린 서로 손을 흔든다.
이번 여행으로 신시도는 나에게 휴양의 섬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다시 신시도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겠다. 물론 물론 많은 일이 벌어지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