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사강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강가에 모래가 많아 이곳을 사강이라 불렀다. 기형도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 아무도 간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하면서 <사강리>를 시작한다. 너무나 황량한 곳, 내리는 눈마저 아픔으로 오는 곳으로 그려내고 있다. 기형도 시인이 슬퍼해 주던 사강리는 황폐했었지만, 30년도 더 지난 지금은 그 쓸쓸함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역 교통의 중심이 되어 활기찬 지역으로 변화 되었기 때문이다. 기형도 시인의 <사강리> 속의 슬픔은 이제 사라졌다. 그가 사강리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갈대가 모여서 울던 어떤 이의 무덤을 찾았던 것일까? 자신과 이름이 같은 형도에 가기 위해서였을까?
사강리(沙江里)
기 형 도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까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 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그것 봐' '그것 봐'
황톳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눈(雪)이 꽂혔다.
사강리를 지나 형도로 가는 길에 잠시 멀리 우음도가 보이는 곳에 멈추어 섰다. 드넓은 갈대밭의 평야가 펼쳐있다. 시화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바다였던 지역이다. 방조제가 물을 막아서 드러난 토양 성분에는 식물에 이로운 영양분이 많다.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랄 것처럼 생각되지만, 염분 때문에 살 수 있는 식물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칠면초와 갈대는 대표적인 염생식물이다. 붉은색의 칠면초가 염분을 흡수하고 사라지면 그다음 갈대가 자라나 나머지 염분을 흡수한다. 이런 식물이 자라 흙 속의 염분이 제거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성질이 변하기도 한다.
고정리 평원
“공룡로”라고 이름 붙여진 도로 인근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커다란 바위들이 군락을 이룬다. 이곳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이다. 1994년 시화호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고 땅이 드러나 공룡알과 공룡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발굴된 화석의 공룡 이름은 “코리아케라톱스”라 이름 붙여졌고, 이 공룡은 한국 최초의 뿔이 달린 공룡으로 밝혀졌다.
나의 아들이 공룡을 가장 친한 친구라 여기었던 몇 년 전, 나는 공룡을 탐구 해 본 적이 있다. 내게 공룡 이름을 물어보고 맞추지 못하면 아이에게 핀잔을 들었으니 공룡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뿔이 달린 모든 공룡의 공통점은 모두 초식공룡이었다. 현재의 동물들도 뿔이 달린 동물은 대부분 초식동물이다.
이 작은 공룡알들이 발견되어 도시로 개발될 자연 습지를 지켜내었다.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평원을 마음껏 걸을 수 있고 달려볼 수도 있다. 수풀마다 종달새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두동강난 형도와 모두가 떠난 형도마을
바다에 흙이 메워져 이미 육지가 되어버린 섬 형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의 산으로 보여야 할 섬이 정상부근부터 반으로 갈라져 있다. 시화 방조제에 쓸 석재를 형도에서 채취한 것이다. 채석할 때부터 섬 자체를 없애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처럼 흉물스럽게 산을 두 동강 내었다. 형도는 공사를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이렇게 상처를 키우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섬, 결국 없어져야만 하는 섬.
직선 도로의 끝으로 희미하게 섬마을이 보인다. 투박한 쇠몽둥이 같은 바리케이드가 차량 진입을 막았다. 통제요원이 사람의 진입 또한 막아섰다. 나의 신원을 찬찬이 설명한 후 매우 짧은 시간을 할애받았다. 흙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걸어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 형도 마을에 다다랐다. 파란 페인트로 철거의 순번이 매겨진 집들의 사잇길을 오른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집 마당엔 상처투성이 나뭇잎만 뒹굴고 있다. 홀로 선 “형도마을회관” 간판은 사람들이 짐을 싣고 떠나갔던 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도량형(度量衡)의 형, “저울형” 자를 쓰는 형도는 바닷물의 높이를 재는 섬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저울이섬” 이라고 부른다. 검푸른 갯벌만이 그래도 섬이라고 여기며 형도를 반 바퀴만 두르고 있다. 도시개발로 섬은 사라질 것이고 산은 깎이어 나갈 것이다.
남겨진 형도마을회관과 세워진 날짜만 남긴채 무너진 정문 기둥
1981년 3월 13일 아이들의 즐거운 박수 소리가 들린다. 1961년에 개교한 마산초등학교 형도 분교의 근사한 교문이 완공되었다. 문짝이 달리지 않은 두 개의 돌기둥뿐이었지만 1999년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장승처럼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지켜주었다.
학교 앞에 다다랐다. 정문의 기둥은 그날의 날짜만 간신히 남겨진 채 부서져 길가의 돌무더기로 버려져 있다.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소나무와 향나무는 아직 학교의 경계에 남았다. 건물의 잔해뿐만 아니라 철봉과 미끄럼틀과 국기 게양대마저 모두 뽑혀 사라졌다. 사라질 풍경을 카메라앵글로 붙들어 본다. 저울의 눈금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커다란 말똥가리 한 마리가 텅 빈 형도의 하늘을 휘휘 돈다.
형도의 기억
김 차 중
바다는 섬 자락에 걸터앉아 고깃배를 부른다
아이는 조개 잡는 엄마 곁에 조개껍데기를 고른다
언덕마루 학교의 그네가 넘실대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갯벌까지 닿으면
엄마는 아이의 손을 쥐고
희미해진 노둣길을 걸어 오른다
골목을 휘젓는 아이들의 하굣길은
잠드신 할머니를 깨우고
마중 나온 동생들의 웃음으로
하루에 한 번씩 들썩이는 마을
고기잡이 배들이 섬으로 들면
잠시나마 고요했던 섬마을에
별빛처럼 하나둘 불빛이 켜진다
제부도 갯벌
형도를 뒤로 하고 다시 사강리를 지나 제부도로 향한다. 제부도와 다리가 연결된 송교리에 도착했다. 화성이 고향인 정대구 시인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그가 송산중학교 학생 시절 최병설 선생님에게 들었던 제부도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부도는 송교리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라고 ‘접비섬’, ‘저부리섬’으로 불렸었다고 선생님께 들었어요. 그런데 누군가 한자로 된 지명을 붙이려다 보니 갯고랑을 건널 때 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걷는다는 뜻을 가진 ‘제약부경’을 어디선가 따와 제부도로 이름이 붙여진 거지요.”
보일 듯 말 듯 아련한 느낌의 접비섬이나, 약한 사람을 부축해서 건넌다는 제부도나 살갑고 정답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차량으로 제부도에 가기 위해서는 물 때 시간을 확인하고 가야 한다. 만조 시간대에는 바닷물에 침수되어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이용한다면 운영시간 내에서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수많은 일화가 생겨난 바다가 갈라지는 섬, 청춘의 추억이 고이 간직된 섬이지만 케이블카의 등장으로 섬 전체가 유원지가 된 느낌이다.
절벽 아래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는 길인 “제비꼬리 길”을 걷던 도중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왕진물 쉼터”를 소개하는 팻말이다. 왕진물은 왕에게 진상한 물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체하지 않게 천천히 마시라고 바가지에 나뭇잎을 띄워 주는 이야기의 탄생지가 바로 왕진물 쉼터에서 일어난 것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제부도를 지나는 도중 한 우물에서 최 씨 아낙에게 물을 청한다. 물맛이 좋고 또한 건네 준 물에 나뭇잎 하나를 띄워준 최 씨의 마음씨에 감탄한 인조 대왕은 그만 최 씨의 팔을 붙잡고 만다. 인조 대왕을 수행하던 관리가 그녀에게 “당신은 임금의 성은을 얻었으니 조정에서 연락이 오면 곧바로 입궁하시오.”라고 하며 떠났다. 그런데 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이 일을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중 최 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인조 대왕은 최 씨의 일가에게 제부도의 땅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걸음마다 달라지는 갯벌의 풍경이 가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모래해변에 이르면 수박 크기의 검은 암석들이 모래사장 너머로 촘촘히 박혀있다. 별들이 내려앉은 느낌이다. 별 한 덩이를 들추면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재빠르게 숨을 곳을 찾아다닌다.
매바위
모래 해변의 끝에는 “매바위”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다. 제부도의 상징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삼형제바위 중 가장 큰 남쪽의 바위는 특히 그 모습이 매의 부리가 물 위로 솟은 모양이다. 특정한 각도에서 보면 영락없이 매부리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노을빛은 어느 지역에서 보아도 아름답다. 뒤돌아 갈 길이 없는 연인들이 바라보는 제부도의 저녁 하늘빛은 그 붉음에 애틋한 사람들의 낱말이 서려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