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다"는 말은 맑은 하늘과 깊은 바다나 초원의 빛깔처럼 선명한 것을 말한다. 파랑이나 초록의 범위를 넘어서는 색깔이다. 청산도는 그런 빛깔이다. 섬들의 이름이야 모두 아름답지만 청산도만큼의 푸르른 느낌을 가져다주는 이름이 있을까.
완도항에서 출발한 수용인원 600명의 대형 여객선은 마치 유람선처럼 고요히 청산도로 흘러간다. 배는 정박을 마쳤고 나는 섬에 닿았다. 청산도에 들어와 15년간 사진작가로 생활한 김광섭 작가의 마중을 받았다. 처음 만난 사이일지라도 영화 <백투더퓨쳐>의 브라운 박사를 닮은 그의 모습이 반갑고 익숙했다. 그의 차를 타고 분주한 선착장을 빠져나와 당리마을에 도착했다.
청산도 당리마을에서 내려다본 풍경
청산도는 서편제의 촬영장소로 널리 알려진 섬이다. 세 명의 배우가 5분여 동안 황톳길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최고의 장면으로 꼽힌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보았을 때도 시골에 살았던 나의 눈에도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던 장소였다. 고정된 카메라의 구도가 풍경을 돋보이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한 기억도 있다.
삼거리 황톳길, 그 아래 포구는 영화에서 보던 옛 모습이 묻어 있다. 청산도 유채꽃이 지고 몽글몽글한 열매만 남았어도 그저 푸르른 섬이다. 굽어져서 무던하고 갈라져서 아름다운 길이 갯벌까지 닿아 있고 그 길은 건넌 마을까지 오른다.
아시아 최초 지정된 슬로시티를 달팽이처럼 천천히 걸어야 하는데 가 볼 곳이 많으니 걸음이 바쁘다. 초가집 주막의 음식 냄새가 코끝에 스쳐 갔지만 머무를 수 없다. 청산도 특산물 코끼리마늘이 들어간 파전은 다음에 와서 맛봐야겠다.
영업하는 서편제 주막과 포구
계단식 논인 다랑논과 구들장논이 펼쳐진다. 다랑논은 계단식 논이고, 구들장논은 온돌바닥의 구들장처럼 하단에 돌을 쌓고 벼가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덮어 만든 논이다. 물이 통하는 길을 논 하부로 내고 위의 논에 물이 차면 아래의 논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1600년대부터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의 성질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조들의 지혜로 만든 농법이다. 지구에서 오직 청산도에서만 발견된 귀중한 세계적 농업 유산이다.
농부가 앉은 초록색 마늘밭과 다 익은 황금색 보리밭이 청산도에 색을 덧칠한다. 길가에는 분홍색 낮달맞이꽃이 한 줄로 늘어서서 낮달을 기다린다.
윗동네 친구 집에 가시는 할머니
상서리에 온 목적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나를 안내해 주는 김광섭 작가의 사진 전시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작은 카페 공간과 전시실을 겸하였는데 15년 동안의 청산도의 사계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김 작가는 사진마다 촬영당시의 상황을 흥미롭게 설명해 주었다.
오르막 도로 위에서 몇 시간 동안 무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 할머니를 촬영한 사진은 전시된 사진 중에서 우리 두 김 작가가 꼽은 최고의 작품이었다. 당시 김광섭 작가는 힘들게 언덕을 오르시는 할머니를 촬영한 후, 다가가 잠시 쉬고 가시라고 하며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위험한 차도를 홀로 걷는 할머니의 사연은 이랬다.
나는 지금 윗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침 먹고 출발해 서너 시간이 흘렀는데도 반도 못 걸어왔다고 한숨이다. 젊었을 때는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서 놀고 집에 왔는데 이제는 그 집에 가려면 하루는 자고 와야 한다. 그래도 이 길이 나의 남은 날의 큰 즐거움이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꾹 누르고 일어서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느릿느릿한 이야기가 담긴 사진 한 장이 청산도와 참 많이 닮아있다.
상서리에 온 두 번째 목적은 돌담이다. 제주도의 돌담은 동글동글 유연한 모양이어서 낭만을 품고 있는 듯한데, 청산도의 모가 난 돌담은 고단한 삶이 서려있는 것 같다. 담쟁이가 돌담을 부여잡고 초록을 틔운다.
상서리 돌담길
청산도의 밤은 어떨까. 자정 무렵 김 작가를 보채어 다시 당리마을로 왔다. 가로등도 없다. 불빛 없는 민가는 위치도 찾기 어렵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달 없이 하늘의 별만으로는 길의 폭도 가늠하기 어렵다. 은하수를 보러 왔다. 아무리 청산도의 밤하늘이지만 오월의 은하수는 맨눈으로 보기는 힘들다.
김 작가는 청산도에서 은하수 촬영을 수십 차례 성공했다고 한다. 구름은 밀려오고 달은 떠오를 시간이 다가온다. 김 작가의 초조해진 손이 바빠진다. 멋진 은하수를 나에게 보여준다. 나는 김 작가에게 시 하나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