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금 보관용으로 우체국 통장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우체국 통장은 두 번째다. 우체국 통장을 처음 만든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동네의 유일한 가게 삼양상회 주인 어르신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스쿠터를 타고 다녔다. 삼양상회는 구멍가게 한편에 라면과 국밥을 파는 작은 식당이다. 동네 꼬마들의 용돈이 모조리 그곳에 모였으니, 나의 눈에는 그 집이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으로 보였다. 가게는 동네의 입구에 있었고 그 끝은 우리집이었다. 두 집 간의 거리는 백 걸음 정도의 신작로로 이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구멍가게로 갈 때 걸음 수를 세면서 걸었기 때문에 발자국 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다.
스쿠터의 진동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신작로가 관통하는 마을을 울렸다. 스쿠터를 타는 가게 어르신을 동네 아저씨들은 부러워했다. 마을 아저씨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버지도 역시 자전거를 타고 동네의 경사길을 오르내리며 일터를 다녔다.
아버지께 스쿠터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 생각을 하고 난 후부터 철이 든 것 같다. 손잡이를 비틀기만 하면 으르렁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스쿠터를 타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동네를 관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줄곧 상상하였다.
가끔 심부름하면 돈이 생기기도 했지만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고철과 빈 병을 주워 고물상에 파는 것이었다. 그때는 동네 꼬마들과 함께하는 부업거리였고 삶이었다. 사월의 어느 날 모은 삼천 원을 들고 오백 걸음쯤 떨어진 우체국으로 가서 저금통장을 만들었다. 통장을 채워 아버지께 스쿠터를 사드리기 위함이었다.
신문 광고에 실린 스쿠터는 삼십만 원이었다. 형이 신문을 배달하였기 때문에 우리집은 한동안 신문을 볼 수 있었고, 나는 스쿠터의 가격을 신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삼천 원을 백 번만 입금한다면 아버지에게 선물을 사드릴 수 있었다.
통장의 줄 수는 백 줄을 충분히 넘고도 남았다. 통장에 삼천 원의 숫자가 가득히 채워진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삼천 원을 백 번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6년 12월 폭설이 내렸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했던 아버지께서 앰뷸런스에 실려 집에 오셨다.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는 하얀 입김을 내쉬며 들것에 실린 채로 방으로 들어가셨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올라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는 아버지의 넓은 등에 그렸던 그때의 세상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목적을 잃어버린 파란 통장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고, 아버지가 적어준 편지처럼 37년 만에 그때의 이야기가 우체국 통장에 적혀 나에게 도착하였다. 나는 아버지께 짧은 답장을 적어 올린다.
'사랑해요. 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