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시 마을, 벌영리 메타세쿼이아 숲
아침 촬영 채비를 갖추고 '괴시 마을'에 도착했다. 기와집이 드넓은 마을을 이룬다. 괴시 마을은 마을 북쪽에 호수가 있어 불렀던 '호지 마을'이라는 이름과 공존한다. 이 마을은 구주소로 '괴시리 000'을 사용하고, 도로명 주소로는 '호지마을길 000'을 사용한다.
괴시 마을은 고려의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또한 원나라에서 귀향해 노쇠한 어머니를 보살피러 머문 곳이다. 선생은 중국의 학 구양박사의 괴시마을과 호지촌의 풍광이 흡사해서 괴시라고 고쳐 불렀다. 아마도 구양 박사를 존경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싸늘한 공포가 밀려오는 이름 같지만, 괴시(槐:회화나무 괴, 市)는 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이 마을은 8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마을은 전통 한옥뿐 아니라 유교의 예법과 풍습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대문마다 분홍과 빨강의 접시꽃이 환하게 피었다. 담장 위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은 하늘로 줄을 는 듯하다. 꽃 모양이 장미를 닮아서 장미라고 부르면 장미라 대답할 것 같고, 나팔꽃이라 하면 나팔꽃이라 대답할 것 같은 수수한 꽃이다. 골목을 따라 기와집 사이를 오가며 고고한 옛 거리를 걸으니 들뜬 마음이 그윽해진다.
목은 선생의 기념관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 뒤 산길에 올랐다.
목은 선생은 원나라에 건너가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다. 그는 또한 정몽주,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하다. 선생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유배 생활을 치른 후 오대산에 머물다가 여주 신륵사로 피서를 가던 중 배 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이 사건은 정도전의 사주로 인한 것일 수 있다고 학자들 간에 추측이 되기도 한다.
선생의 집터라고 표시된 곳에 "가정 목은 양 선생 유허비"라고 쓰여있는 비석이 가로누워있다. 땅에서 발굴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목은 선생의 아버지 '가정 이곡'과 목은 두 분의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마을 입구에 같은 글자를 새긴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아무래도 기념관 앞에 누워있는 이 비석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유허비란 선인을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새운 비를 말한다. 기념관 뒤 소나무밭 아래에는 선생이 관어대를 지은 이유를 적은 "관어대소부" 비가 있다. 고래불 해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상대산 정상에 관어대가 있는데, 이 뜻은 바다에 유영하는 '수많은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을을 나와 벌영리 메타세쿼이아 숲을 찾았다. 영덕이 고향인 독지가가 20년 전부터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해 측백, 편백, 삼나무 등을 심어 일반인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입장료가 무료면 주차 요금을 받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주차도 무료다. 영덕에는 인심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앞서간 사람들은 길의 안내자가 된다. 수목원에 가면 입구부터 설치물이 많아 산만한 모습인데, 이곳은 입구부터 숲이라 해도 좋을 만큼 고요하고 단정하다. 영덕의 바닷바람이 낙동정맥에 처음으로 닿는 곳, 숲에 아직 봄의 살랑거림이 머뭇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