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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차중 Jul 31. 2024

파도와 바람 속의 명상, 고성

경상남도 고성은 일억 오천만 년 전의 공룡의 발자취와 천오백 년 전 가야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가야인의 커다란 무덤이 차창 너머에 병풍처럼 펼쳐 보인다. 고성을 찾은 이유는 고성군에서 주최한 치유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태고의 풍경 속에서 명상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쉽게 주어질 리 없기 때문에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 가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곳

버스는 상족몽돌 해변에 도착했다. 10여 명의 일행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단체 사진 촬영을 마치고 스틱을 양손에 들었다. 우리는 곧바로 지도사로부터 노르딕 4족 보행법을 전수받았다. 스틱을 이용한 보행법은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했다. 상족몽돌 해변은 남파랑길 33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길 옆 수직 암벽에는 원시적 풍경으로 물이 흘러내린다. 공룡 발자국이 있는 상족암을 가려면 숲길을 지나야 한다. "고성해양치유길-자연인 로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은 고성군에서 "자연인 로드"라는 치유프로그램으로도 이용되는 길이다. 표지판은 스틱을 이용한 노르딕 4족 보행과 석기시대 사람들이 먹었다는 자연식, 그리고 명상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다. 걷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복합적인 자연 치유법을 결합한 프로그램이다. 상족암으로 가는 길은 해안에 설치된 데크로도 갈 수 있지만 지도사는 산길을 선택했다. 하늘색의 가방을 메고 줄지어 길을 걷고 있는 한 줄로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이다. 

남파랑길 33코스 출발지 덕명리 포구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파도 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숲을 빠져나와 상족암에 도착했다. 거제, 통영, 남해는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섬들과 함께 고성 지역을 감싸고 있어 좀처럼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는데, 포구는 태풍 '개미'의 여파로 파도가 거세다. 넓은 파식대에는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이 산재해 있다. 부안 격포의 채석강과 색과 모양이 비슷하다. 

상족암에서 바라본 바다

드문드문 여러 종류의 공룡 발자국이 보인다. 불규칙한 배열의 발자국도 있지만 한 마리의 공룡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간 흔적과 무리 지어 일렬로 걸어간 발자국들이 있다. 호수였던 곳이 바다가 되었고 발자국을 덮었던 퇴적물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 흔적이 드러났다고 한다. 끊임없는 풍랑에 마모될 것이기 때문에 이곳의 발자국을 볼 수 있는 것도 한세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빗물이 웅덩이가 된 발자국을 채워 선명한 윤곽이 나타났다.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이다. 천연기념물 411호로 지정된 이곳은 6km의 해안선을 따라 이천 개가 넘는 발자국이 남아있다. 백악기 공룡 발자국의 수량과 다양성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발자국뿐 아니라 공룡의 무수한 발걸음이 남긴 공란 구조, 물결이 만든 연흔 구조, 마그마가 암석을 뚫고 나온 암맥, 주상절리 등의 다양한 암석의 형태가 있다. 이곳은 지질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명상을 위해 병풍바위가 보이는 넓은 파식대에 모여 앉았다.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스펙트럼처럼 분쇄되는 여러 갈래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으로 물결이 다가옴을 느낀다. 바람과 파도소리가 분리가 되었다가 결합이 된다. 앞으로 명상이 취미가 될 듯하다. 

상족암의 다양한 공룡 발자국
파식대 위의 명상

수면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전날의 사족보행과 명상 덕으로 숙면의 밤을 보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파도가 잦아들었다. 장마가 걷힐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콘크리트 벽에 갇힌 작은 게 한 마리를 구출해 주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명상의 효과가 위기에 처한 한 생명을 살렸다. 

남산에서 명상이 있는 날이다. 숙소에서 해안 데크를 따라 걸었다. 강한 햇볕이 비추지만 어제보다 습도가 낮아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넓은 곳에 앉아 오늘의 프로그램을 안내받고 혈당 체크를 했다. 사람 수만큼 혈당 수치는 다양했다. 기준치에서 조금 높은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매일 약을 복용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혈액 채취용 바늘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식후 두 시간쯤 지났는데 나의 혈당 수치는 94가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눈치다. 즐거운 마음으로 치유의 길을 이어 걸었다. 맑은 하늘과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운 솔섬들이 명상하는 듯하고, 남산 계곡에서는 쓰러진 나무 아래로 계곡물이 작은 폭포를 만들어내며 소란스럽게 흐른다. 어제와 달리 가파른 산행길이다. 혈당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난도가 높은 길이 주어진 것 같다. 

남산에서 바라본 바다, 솔섬들이 명상을 하는 듯하다
남산의 원시 계곡

앞뒤의 간격이 멀어졌지만 모두 안전하게 전망대에 도착했다. 고성읍이 한눈에 보이고 뒤로는 산이 병풍을 이룬다. 이곳부터 정상부까지는 정원으로 가꾸어졌다. 이단 기와지붕의 남산정에 올랐다. 바람이 불어온다. 남해의 바람이다. 마지막 명상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바람은 명상 지도사의 머리카락으로 무늬를 만들었다. 바람의 소리가 어제의 파도 소리처럼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정신은 내면 깊은 곳을 유영한다. 명상이 일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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