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가배(咖啡)」
여자와 엽옥파의 세 여인은 가배(찻집)를 향해 길거리를 걸어갔다.
“선생님들께선 이 거리에 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던걸 청하 선생께선 당연히 와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여자와의 생각과 다르게 두화와 연홍은 이미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청하는 짦막히 말한다.
“저는 자주 옵니다.”
여자는 두화와 연홍의 대답에 의외라고 말하다가 문득 달리 생각을 고친 것인지 이런 말을 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명색의 엽옥파 문하인데.”
두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예, 말 그대로입니다.”
연홍은 아무 말 없이 땅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샌가 청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해, 안 오고.”
저 멀리서 떨어져서 걸어오고 있는 연홍을 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연홍을 제외한 세 사람은 이미 가배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선생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오니, 금방이군요.”
여자는 그리 말하며 이국적인 가배 문앞을 열어, 세 여인을 정중히 안으로 들였다. 두화는 여자를 따라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매우 아늑하군요.”
연홍도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말한다.
“…괜찮네요.”
청하는 무심하게 반응한다.
“나쁘지 않네요.”
여자는 미소지으며 동의를 구한다.
“그렇지요?”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은 아까 전보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는 주문했던 가배가 놓여졌다.
“향긋하네요.”
두화는 그 말을 한 뒤, 조금의 망설임 없이 가베를 한 모금 마셨다. 당연히 옛스런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양의 문물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몸소 체험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디스하모니였다. 연홍도 두화를 따라서 조용히 가배를 홀짝였다.
“좋네요.”
청하는 눈을 감고 가배를 음미하는 듯했다.
“괜찮군요.”
여자는 안심한 듯이 웃으며 말한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요즘 유행하는 SM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그게 무엇이지요?”
두화의 물음에 여자는 그 ‘SM’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했다.
“여학교 내에서 각별하게 친밀한 관계라고 하던가요. 또는 그러한 것을 하는 걸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더군요. 예를 들자면 같은 여자끼리 연인 놀이를 한다든가.”
두화는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조금 부끄러운 듯한 눈치였다. 연홍은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참으며 여자의 말에 반응한다.
“그, 그런가요?”
청하는 심드렁하게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군다.
“뭐, 어디선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자는 청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예. 실제로 여학교 내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비밀스럽게 행해지는 일이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사제지간에서도 일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여자가 하는 말에 연홍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두화를 힐끗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하는 손등으로 턱을 받치면서 덤덤하게 말한다.
“그거 참 흥미로운 일이네요.”
두화는 청하의 말에 차분히 동감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찻잔을 든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SM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현상은 이미 문학계에서도 실험적인 소재로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카와세미 문하의 세키 코우카라는 여성 소설가의 『여학생일지』가 선두로 대중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또한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홍은 여자의 말에 손을 떨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 그렇군요...”
청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여자의 말에 경청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군요. 그 소설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길게 술술 이어갔다.
“이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인 유리코라는 여학교 2학년생이 스승인 료쿠요를 짝사랑하며 시작되지요. 동성이지만 유리코라는 아이는 료쿠요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지요. 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기괴할 정도였달까요. 다른 여학생이 료쿠요에게 다가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질투심을 느끼지요. 한편 료쿠요는 그런 유리코의 마음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찌 미묘한 관계를 이어나가지요. 그러나 사제지간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것과 설상가상으로 료쿠요의 결혼 소식이 전교에 퍼지게 되자 유리코는 료쿠요에 대한 애절함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결국 어느 날 유리코는 눈물을 흘리며 료쿠요를 덮치고 말아요. 료쿠요는 그런 유리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요. 시간은 흐르고, 유리코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료쿠요 또한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리코는 한동안 벚꽃이 만개한 따스한 봄날에 상반되는 감정과 함께 고뇌에 빠집니다. 그러나 료쿠요가 혼례복을 입고 남편이 될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른이 되어가지요. 참으로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여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게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면 믿으실 수 있을신지요.”
연홍은 여자의 말에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대정 8년이 되자마자 나온 어느 여학생의 자서전을 소설로 각색했지만 말이죠.”
두화는 여자가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에 놀라움을 느꼈다. 한편 연홍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죽였다. 옆에 있던 청하는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이다.
“대단하네요. 그런 작품이 있었다니.”
“그치요? 하지만 아직 조선 내에서는 이런 소설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여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여자는 두화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서 말이죠… 이러한 실험적인 소설을 엽옥파에서 최초로 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엽옥파 문학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할까요.”
두화는 여자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연홍은 불안한 눈으로 두화를 쳐다보았다. 반면, 청하는 그녀 특유의 삼백안이 반짝이며 흥미를 가졌다.
“그거 좋네요.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여자는 청하의 말에 힘입어 말한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꽤 괜찮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어린 소녀부터 시작해서 젊은 여성까지 이렇게 비밀스럽고 매혹적인 문화를 즐기고 있다는 건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드는 일이니까 말이죠.”
두화는 여자가 한 ‘상상력’이라는 말에 꽂혔다. 연홍 또한 조심스레 의견을 내지만, 그건 눈치를 보며 참으로 말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해보는 것도...”
그때 청하가 두화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거린다.
“괜찮지 않겠나요, 선생님.”
여자는 더욱 강력히 주장한다.
“분명 엽옥파 문하의 선생님들이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탄탄대로이겠지요. 이참에 선생님들께서도 직접 경험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두화는 경험해보라는 말에 당황해 하면서도 은근한 호기심이 자극되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듯했다. 청하 또한 두화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경험이라...”라고 말한다. 반면 연홍은 눈에 띄게 놀라며 당황스러워한다. 여자는 연홍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다.
“연홍 선생님...?”
연홍은 여자의 부름에 잠시 흠칫했다. 그녀는 두화를 힐끗 보며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대답한다.
“...네, 네?”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이신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연홍은 다급히 아무것도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한다. 그런 연홍의 반응에 청하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두화 선생님께선 흥미로워하시는 듯한데, 하하.”
두화는 이미 여자의 말에 매료된 것 같았다. 그런 두화의 모습에 연홍은 동요했다. 청하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고.”
“그래요 그래요. 이 참에 한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디 그걸 작품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여자는 챙겨온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나갈 채비를 한다. 여자의 말에 기대감을 안고, 엽옥파의 실험 정신을 보여, 엽옥파의 미래를 꿈꾸었다. 연홍은 여자가 일어나자마자, 같이 일어섰다. 마치 한 시라도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청하도 따라 일어섰다.
“조심히 가세요, 한월 님.”
“그럼 이만.”
여자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엽옥파의 세 여인을 뒤로 하고 거리를 걸어갔다. 세 사람은 여자가 떠나간 뒤, 각자의 생각으로 조용해졌다. 연홍은 복잡한 심경으로 두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걸 눈치챈 청하가 연홍에게 묻는다.
“야, 너 왜 그래?”
연홍은 청하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이내 조심스레 말한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청하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까 그 분이 말한 여학생과 여스승의 이야기.”
“흥미롭던데.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청하가 두화를 향해 물었다.
“글쎄, 확실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것 같구나.”
두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기쁜 듯한 표정으로 연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연홍아. 네가 제일 잘할 것 같으니, 널 모범 삼아 우리가 한번 이어나가는 게 어떻겠느냐? 연홍이 네 특유의 작품과도 잘 어울리지 않느냐.”
두화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런 두화의 모습에 연홍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듯한 말에, 아니,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만 같은 말에 눈에는 맑은 빛이 돋보인다.
그러나 역시 복잡한 심경은 어찌 떠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홍은 두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홍에게 있어서 두화는 절대적이었다. 연홍에게 있어서 두화를 거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